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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인터뷰] 정지혜 감독 "삶 거머쥐려는 정순 응원해달라"

입력 2024.04.22. 06:03 댓글 0개
장편영화 데뷔 '정순'으로 주목 정지혜 감독
디지털 성범죄 피해 중년 여성 이야기 담아
"어디서나 일어날 수도…중년 피해자 많아"
"식품 공장 일한 경험 반영해 작업 시작해"
"삶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선언 하는 인물"
"이상적이지 않은 결말…그것도 우리 현실"
"당분간은 여성 서사 만드는 데 집중 계획"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집에서는 엄마, 직장인 식품 공장에선 이모로 불리는 정순은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결혼을 앞둔 딸과 투닥대고, 직장 동료들과는 수다떠는 게 일상인 그의 삶은 공장에 영수가 들어오면서 바뀐다. 피차 외로운 처지인 이들이 연애를 하게 된 것. 그러나 오랜 시간 멀리 떨어져 있던 설렘을 다시 마주하게 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두 사람 외에 누구도 알지 못해야 할 영상이 공장 직원들에게 퍼져버린 것이다. 이제 정순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수치심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영화 '정순'(4월17일 공개)은 이제 정순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본다.

'정순' 각본과 연출을 맡은 정지혜(29) 감독은 올해 한국영화계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이 영화가 장편영화 데뷔작인 정 감독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 관해 얘기하면서 동시에 이 이야기를 특정 대상을 뛰어 넘어 여성 전체를 향해 가는 작품으로 확장하는 노련함을 보여준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고, 각종 해외 영화제에 초청된 건 현재 한국영화계에 '정순'이 소중한 작품인지 알게 해주는 방증이다.

목표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짜인 구조가 정확하고, 대사를 해야 할 때와 하지 않아야 할 때는 구분한 판단이 예리하며, 대사 한 줄 쇼트 하나를 낭비하지 않으려는 시도에선 야심이 엿보인다. 긴장감을 끌어올려야 할 때와 강렬한 충격을 전달해야 할 때를 균형감 있게 다루는 연출 역시 첫 장편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정순'을 완벽에 가까운 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정 감독 차기작에 향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엔 충분한 결과물이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정 감독을 만났다. 그는 "정순의 행보를 통해 '내 삶은 내 것이다. 내 삶의 의지를 누구에도 빼앗기지 않겠다'라는 걸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곧 개봉이다. 기분이 어떤가.

"꿈꿔왔던 순간이라서 떨린다. 긴장되면서 설렌다."

-개봉 전부터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주목 받았다.

"수상은 전혀 예상 못했다.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다. 상을 받아서 좋다기보다는 상을 받음으로써 이 작품에 참여한 모든 분들이 좋아해준다는 게 좋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 영화인가.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어서 시작한 작품은 아니었다. 영화 배경이 되는 식품 공장에서 1~2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함께 근무한 분들이 정순과 같은 중년 여성이었다. 함께 오래 일을 하다보니까 가까워졌고 그분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듣기도 했다. 그게 영감이 됐다. 그러면서 나와 같은 여성이지만, 다른 세대인 그분들이 주인공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공장에서 일한 게 언제였나.

"2015~2016년이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바로 묻고 싶다. 왜 중년 여성이 주인공이었나. 우리 사회는 중년 여성의 성을 젊은 여성의 성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이런 지점에서 볼 때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가려면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택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기 전에 편견이 있었다.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니까 마치 젊은 세대에 국한된 문제 같지만, 막상 조사를 해보니까 가해자 중 상당수가 중년 남성이더라. 내가 매우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출발한 거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젊은 여성보다 중년 여성이 성에 더 결백해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 이런 틀 때문에 위축돼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중년 여성 피해자가 많다고 봤다. 그래서 '정순'을 꼭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찍고 싶었다."

-취재는 어떤 식으로 했나.

"일단 공장에 관해서는 그곳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취재가 딱히 필요하진 않았다. 공장이라는 작은 사회, 어떤 규율이 있는지, 어떤 조직 문화가 있는지 경험한 걸 잘 살려서 작업했다. 이를 통해 공장 안으로 들어갈 때 완전히 다른 사회로 들어가는 정순의 모습을 담아내려 했다."

-디지털 성범죄 부분은 어떤 취재를 했나.

"이 작품 하기 전에 학교 선배가 쓰던 시나리오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시나리오도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때 각종 단체와 활동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그게 도움이 많이 됐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피해자의 전형성 같은 게 많이 허물어졌다. 피해자는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사건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게 '정순'에 녹아들었다."

-각본을 쓰는 데 얼마나 걸렸고,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나.

"1년 정도 썼다. 영수와 도윤을 그리는 게 가장 큰 도전이었다. 최대한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리고 싶었다. 다만 이들이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과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라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진 않더라. '정순'에는 이들이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직접 설명해주는 대목이 없지 않나. 그런 설명 없이도 관객이 보기에 이들이 정말 평범해서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걸 느꼈으면 했다."

-그래서인지 특히 영수 캐릭터에 여지가 많이 보이더라. 이 사람은 가령 전혀 반성을 하지 않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다. 어느 정도 인간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런 캐릭터 설정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 입장에서 볼 땐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음…정말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이다. 그래도 결국 중요한 건 가해자들이 대체로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범죄와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특히 가해자를 생각할 때, 대부분 사람은 나는 저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거다. 그게 아니라는 거다. 유포한 사람을 포함해서 유포된 걸 보는 사람 역시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수나 도윤은 극악무도한 캐릭터가 될 순 없었다."

-정순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에 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 영화 핵심으로 봐야 할텐데, 이 시퀀스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정순이 여러가지 이유와 상황으로 인해 영수와 도윤을 선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순 스스로 떳떳함과 결연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어떻게 그릴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공장 안에서 일을 벌이기로 한 거다. 정순은 공장 안에서 정해진 질서에 순응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상이 유포됐다. 정순은 바로 그 공간으로 돌아가 자기 영상을 본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의지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다고, 내 삶은 내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래서 위생모를 벗고, 사람들 앞에 서서, 자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거다. 그러면서 난 영상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희 눈 앞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다."

-이 장면 촬영이 어렵지는 않았나.

"정순을 연기한 김금순 배우도 이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로케이션 헌팅 때 이곳에 함께 가서 둘러봤다. 이 장면에 관해서는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주고 받았고, 촬영 전엔 콘티를 정말 철저히 준비해 갔다. 그런데 배우들과 리허설을 해보니까 콘티대로 하는 것보다는 김금순 배우가 연기하는대로 따라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더라. 김금순 배우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게 최대한 한 호흡에 따라가는 게 중요했다."

-안 그런 역할이 없겠지만, 특히 정순이라는 인물은 배우 연기력이 매우 중요해 보였다. 가장 극적인 감정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이지 않나. 김금순 배우를 택한 건 역시 연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겠다.

"맞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정순을 현재 정순보다 연령대가 높은 60대 여성으로 설정했다. 다만 시나리오에는 정순이 60대라는 게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았고, 프로듀서는 이 시나리오를 읽고 내가 설정한 정순보다 나이가 어린 김금순 배우를 딱 떠올렸더라. 김금순 배우는 워낙 다양한 작품에 나와서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다. 원래 나이 설정과는 상관 없이 김금순 배우가 정순에 너무 잘 어울리더라. 다행스럽게도 김금순 배우가 '정순'을 좋게 봐줘 함께할 수 있게 됐다.

-다시 마지막 장면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물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부합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폭력 범죄는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 않나. 그걸 피해자 개인이 극복하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나.

"이 부분 역시 정말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다. 바람직한 답은 가해자는 응당한 처벌을 받고, 정순은 법 안에서 보호 받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할 땐 n번방 사건이 공론화 되기 전이어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체계가 지금보다 부족하기도 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바람직한 결말로 이 영화를 마무리 짓기 힘들었다.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결말이 나와야 한다고 봤다."

-영화 속 핵심 사건이 매우 늦게 발생한다. 사건 발생 전까지는 정순의 일상을 길게 보여준다. 일반적인 영화 문법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당신이 말한대로 주요 사건을 앞에 넣는 게 어떠냐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정순의 삶의 한 부분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순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일상, 그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둘러싼 환경을 성실하게 보여줘야만 사건 이후 정순의 선택을 관객이 응원할 수 있다고 본 거다."

-관객이 정순을 어떻게 봤으면 하나.

"정순이 지금 어디에선가 살아가고 있다, 정순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면 정말 좋을 거다. 또 '정순' 안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지 돌아볼 수 있으면 그보다 감사한 일은 없을 거다."

-이제 데뷔했다.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 갈텐데, 현재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어떤 건가.

"내가 잘 아는 이야기다. 그건 결국 여성 서사가 될 것이다. 아직까진 그게 더 재밌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확장해 나가야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것 같다."

-준비 중인 작품이 있나.

"지금 작업 중인 시나리오는 중학교 학생이 주인공이다. '정순'과는 분위기가 다른 코미디 영화다.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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