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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세상에 필요한 영화···'그녀가 말했다'

입력 2022.11.30. 09:30 댓글 0개

기사내용 요약

30일 개봉 영화 '그녀가 말했다' 리뷰

하비 와인스타인 성폭력 사건 담아내

뉴욕타임스 기자들의 취재 과정 그려

저널리즘 전범(典範)…연대 과정 담아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세상에는 꼭 만들어져야 하는 영화가 있다. 이런 작품들은 종종 평가의 범위를 벗어나곤 한다. 이런 영화들에 대해 흔히 말하는 각본의 완성도 혹은 연출의 정교함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그런 영화들은 다루기로 한 소재와 그것에 접근하는 태도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기에 별점 같은 것으로 재단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마리아 슈라더 감독의 '그녀가 말했다'가 이런 영화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고발 기사를 쓴 기자들과 기사의 일부분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명확한 목표와 올곧은 태도를 가지고, 정직한 화법과 진솔한 과정을 통해, 관객의 마음에 적중한다.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완벽하게 좋은 영화인 건 분명하다.

'그녀가 말했다'는 뉴욕타임스 탐사보도팀 기자 메건 투히와 조디 캔터가 2019년에 내놓은 동명 논픽션이 원작이다. 두 여성 기자는 2017년 10월, 아카데미 작품상 영화를 6편 만든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제작자 와인스타인이 수십년 간 여성 배우·직원 등을 상대로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을 저질러 왔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에 기름을 부었고,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그동안 감춰온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기폭제가 됐다. 영화는 세계를 바꿔놓은 미투라는 거대한 물결의 시발점인 투히·캔터 두 기자의 취재 과정을 집중적으로 담는다. 이 작품의 목표는 슈라더 감독의 말로 확인된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헌신과 인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목표였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녀가 말했다'는 얼마든지 자극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다. 가령, 영웅을 있는 힘껏 추앙하고 빌런을 더 철저히 몰락시켜 말초적인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었고,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성폭력 묘사로 관객의 분노를 쉽게 끌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선정적 연출엔 관심이 없다. 대신 쉼없이 팩트를 발굴하고 가까스로 손에 넣은 사실 관계를 좌표 삼아 진실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더듬거리며 전진하는 저널리즘이 있다. 피해자를 최대한 보호하고 그들의 용기를 존중하는 올바르고 신중한 인간성이 있다. 실제로 제작진은 ▲가해자의 얼굴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성폭력 묘사는 하지 않는다 ▲피해 사실에 대한 내용은 피해자의 언어로만 표현한다 등 명확한 지침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녀가 말했다'는 2016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스포트라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두 작품 모두 가장 민감한 주제인 성폭력 문제를 다루고, 비슷한 소재의 다른 어떤 영화보다 차분하고 건조한 분위기 속에서 정확하고 집요하게 일하는 프로페셔널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닮았다. 말하자면 두 영화가 공통적으로 표현하는 뛰어난 언론인은 특별한 재능으로 기발한 기사를 써서 단번에 판을 뒤엎는 천재가 아니라 출고 직전까지 기사를 고치고 또 고치며 어떻게든 팩트 하나라도 더 추가하려 하며 사소한 띄어쓰기까지 체크해야 안심하는 범재(凡才)다. 그래서 투히는 피해자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제가 쓴 기사가 당신이 과거에 겪은 일을 바꾸진 못합니다. 기사가 나가고 나면 당신의 삶을 힘들어질 겁니다. 고소 당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다른 피해자가 나오는 건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저널리즘이 이 작품의 한 축이라면 연대는 이 영화의 또 다른 기둥이다. 슈라더 감독은 연대가 가진 강력한 힘을 보여주기보다는 연대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마음을 모아 간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드러낸다.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싸움의 위험천만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투히는 캔터의 취재에 힘을 보태기로 한다. 회사 수뇌부는 두 기자의 뒤를 받치며 전폭 지원해 그들의 두려움을 상쇄한다. 기자들은 공감과 존중의 태도로 피해자들의 고백에 귀기울이는 방식으로 그들의 고통을 나눠 가지려 한다. 피해자들은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 더 존재하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는 걸 느끼면서 하나 둘 용기를 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기사는 최종 완성돼 세상에 나오고, 와인스타인의 몰락이 시작된다.

'그녀가 말했다'는 주제 의식이 명확한 영화이면서도 서스펜스를 다루는 장르영화로서 재미도 충분히 담아낸다. 영화는 투히와 캔터가 3년에 걸쳐 취재한 과정을 압축해 러닝 타임 129분 내에서 리듬감 있게 이어 붙인다.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하는데다가 전화로 대화하고 만나서 인터뷰하는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도, 매번 핵심을 찌르며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연출 방식 덕에 러닝 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투히가 산후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캔터가 일하는 엄마의 고달픈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들은 두 사람 역시 평범한 여성이라는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성 관객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2017년 10월8일 투히와 캔터가 쓴 기사가 나온 뒤 3일 후 와인스타인은 와인스타인컴퍼니에서 해고됐다. 이듬해 5월 뉴욕 대배심은 강간 및 성범죄 혐의로 하비 와인스타인을 기소했으며, 2020년 2월 1급 성범죄 및 3급 강간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3월11일 23년 형을 선고됐다. 와인스타인은 일부 피해 여성에게 1880만 달러를 주고 합의하고 항소했다. 그러나 지난 6월 항소심에서도 23년형은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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