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기억·기록·증언의 힘이 만든 오늘

입력 2022.05.26. 17:45 수정 2022.05.26. 20:04 댓글 0개
주현정의 무등칼럼 무등일보 취재1본부

'모든 외국인은 지금 당장 광주를 떠나야 한다'라는 전갈이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졌다. 군인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봉쇄망이 점점 좁혀 들어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상무관에서의 합동 영결식에 이어 도청 앞 광장에서의 집회는 이날도 성황이었다. 학생들은 '우리는 왜 무기를 들게 되었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최후의 항쟁에 임하는 각오와 자세를 밝혔다. 언론과 접촉을 꺼려왔던 윤상원도 외신 기자 앞에 섰다. '우리는 패배 할 것이지만, 영원히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극도의 긴장 상태로 며칠 간 잠도, 밥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를 비롯한 도청 안 지도자들, 시민군의 표정만큼은 비장했다. 이 땅의 역사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

1980년5월26일, 42년 전 최후의 항전을 앞뒀던 그날의 역사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져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목격자들의 집요한 기록과 용감한 증언 덕분이다.

신군부의 압박에 눈과 귀를 막았던 언론을 대신해 뜨거웠던 오월 광주의 참 모습을 기억하고 남겼던 목격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오늘인 셈이다.

최근 '나의 이름은 임대운(영문판 Called by another name)'을 출간한 데이비드 돌린저 역시 그 중 하나다.

미생물학·면역학 박사이자 감염병 진단법 개발자 '데이비드'는 오월항쟁의 한 가운데서 '대운'으로 더 많이 불리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르겐 힌츠페터는 취재기자로서 1980년 그날의 참상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푸른 눈의 목격자였지만 임대운은 항쟁을 바투 목격하고, 기록한 시민군 당사자다.

힌츠페터를 비롯한 외신기자들의 통역 역시 임대운과 그의 동료 팀 원버그, 주디 챔벌린, 헤닝 루모어르 등이 도맡았다. 대운은 이 인연으로 계엄군 무전기 감청 요청을 받았고, 시민군과 함께 도청을 밤새 지킨(24일) 유일한 외국인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항쟁이 끝난 후에도 광주의 참상이 여러 외신에 보도되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미군 캠프 내 육군우체국(신군부의 검열 대상이 아닌 미군 행낭을 이용했다고)을 통해 광주 관련 정보를 국외로 반출시키거나,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의 아내 문혜림(본명 헤리엇 페이 핀치백) 여사를 비롯해 독재정권의 참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월요모임'에 이른바 '불온 문서'를 전달한 인물 역시 임대운이다.

그는 정보원이 따라붙을 정도로 철저한 감시와 억압이 있었지만 실상을 알려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텼다고도 했다.

임대운을 비롯해 광주의 고립된 진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는 통로를 만들었던 푸른 눈의 목격자들은 그러나 여전히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으레 오월주간이 되면 단편적으로 소개되고 잊혀질 뿐이다.

임대운은 42년만에 회고록을 낸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더 단단해지는 것이 민주주의이건만,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수 많은 동료들이 지금이라도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짝짝이 신발로 부상 입은 시민군을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나르던 사진 속 그 외국인 팀 원버그가 그렇고, 외신기자들과 시민군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주디 챔벌린과 헤닝 루모어르가 그렇다고 했다.

40여년 전 우리를 기억하고 기록해 준 그들 덕분에 얻은 오늘이다. 더 단단한 내일을 위해 이제라도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주어야 할 것이다. 주현정 무등일보 취재1본부 정치·행정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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