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일제 만행 사과하라" 끝내 못받고 떠났다··102세 이금주 할머니 별세

입력 2021.12.13. 13:36 수정 2021.12.13. 16:54 댓글 0개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꾸려
피해자 권익 회복 위해 평생 헌신
소송만 7번, 80여차례나 일본 오가
고(故)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

일제의 강제동원 사과를 요구하며 평생을 헌신한 이금주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102세.

13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따르면 1988년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를 결성하고 일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금주 할머니가 지난 12일 오후 11시55분께 순천의 모 요양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0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이 회장은 태평양전쟁을 만나면서 인생의 큰 곡절을 맞아야 했다.

스물한 살 때인 1940년 10월 김도민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결혼 2년 만인 1942년 11월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일본 해군 군무원으로 머나먼 남태평양으로 끌려갔다.

아들이 얼마나 컸는지 안부를 묻는 몇 번의 편지가 오고 가는가 싶더니 9개월째부터는 소식이 뚝 끊어졌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편의 소식은 1945년 4월 전사통지서 한 장으로 돌아왔다.

스물아홉 살 때인 1948년 친정 식구들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면서 광주는 제2의 고향이 됐다. 시간이 흘러 주위의 권유에 의해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초대 회장을 맡았는데, 이때 벌써 이 회장의 나이가 69세였다. 이때부터 30년 넘게 일제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는 1991년 대일 소송에 대한 입장이 엇갈리면서부터 전국 조직과는 분리해 독립 단체로 활동해 왔다. 이 회장은 피해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해남이든 완도든 영암이든 노구를 이끌고 길을 나섰다.

변변한 사무실 한 칸도 마련하기도 힘든 시절, 광주 남구 진월동에 위치한 고인의 자택은 자연스럽게 사무실 겸 마음 의지할 데 없는 일제피해자와 유족들의 사랑방이었다.

사무실을 찾아오는 피해자들을 일일이 응대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소송을 돕고 있는 지원단체 관계자, 변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소송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원고들로부터 받아 정리해 다시 일본에 보내는 일은 수십 번의 손길을 거쳐야 했다.

결국 이 회장의 아들과 며느리도 광주유족회 일을 같이 도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손녀 김보나씨까지 사무국장직을 맡아 광주유족회 활동을 거드느라 2000년 초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는 이렇게 본인의 자택으로 온 피해자들의 가슴 시린 상처를 일일이 메모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인 피해자들의 한과 울분은 소송의 근거 자료가 됐고, 1990년대부터는 피해자들을 결집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본격적인 소송에 나섰다. 1992년 원고 1천273명이 참여한 광주천인소송을 시작으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소송, 일본군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등이 원고로 참여한 관부재판 소송, B·C급 포로감시원 소송,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한 한일회담 문서공개 소송 등,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지금까지 7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일본 사법부에 제기했다. 피해자들을 묶어 세워 제기한 7건의 소송은 국내 피해자 단체로는 일본 사법부에 가장 많은 소송 사례다.

그동안 소송을 뒷받침하느라 증인출석, 시민단체와의 연대활동 등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오간 것만 80여 차례가 넘는다. 그러나 결과는 번번이 패소뿐이었다. 일본 법정에서 기각당한 것만도 17차례에 이른다. 이러다 보니 한편에서는 '되지도 않는 일에 헛고생만 시킨다'는 냉소와 질시도 뒤따랐다.

이 회장은 물론 아들, 며느리에 손녀까지 3대가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싸웠지만 안타까운 일은 계속됐다. 2011년 아끼던 며느리에 이어 아들마저 그 해 먼저 보내면서, 사무실로 쓰던 허름한 집 한 채 건사하기도 버거운 처지가 됐다.

결국 2012년 5월 광주 생활을 청산하고 손녀가 있는 순천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익숙한 생활 터전을 떠나 건강마저 쇠약해지면서 9년여 동안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이어오다 지난 12일 밤 세상을 떠났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관계자는 "고인의 피와 땀의 결실인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의 각종 피해 사실 및 소송 자료는 사무실에서 임시 보관 중이다. 보존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하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평생을 일본의 사과만을 요구했던 이 회장의 정신과 울분, 한을 다음 세대가 잊지 않고 기억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고인은 일제 피해자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19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빈소는 광주 천지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월15일, 장지는 순천시립공원묘지다.

김종찬기자 jck41511@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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