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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시 만납시다
입력 2021.11.30. 13:28 수정 2021.11.30. 20:10 댓글 0개그 노래를 들었던 것은 1999년 5월이었다. 그날 서울엔 여름을 여는 비가 내렸고 파란색 옷에 흰바지를 받쳐 입은 남자 아이와 연분홍 한복을 곱게 입은 여자 아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간주가 이어질 무렵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에 앉은 우리들 사이로 걸어오며 노래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순간 우리들의 환호가 아이들을 감쌌고, 아이들의 노래가 우리를 보듬고 있었다. 노래 감상보다 그 아이들의 손을 한번 잡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앞서서 눈시울이 자꾸 시큰거릴 때 울리던 그 노래. '백두에서 한라로 / 우린 하나의 겨레 / 헤어져서 얼마냐 /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 목 메어 소리칩니다 / 안녕히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납시다"였다. 북측 소년단이 처음 남측을 찾아와 무대 마지막 순서에서 앳되지만 다부지게 부르던 그 노래를 듣다 노랫말처럼 자꾸 목이 메던 우리는, 그러나 한동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다시, 그 노래를, 이젠 우리에게 친숙한 그 노래를 다시 들었던 때는 2018년 봄이었다. 남과 북, 북과 남이 손을 잡고 부르던 '다시 만납시다'. 그렇게 금방 와버릴 것 같았던 통일은…여전히 아득하다.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다던 우리는 여전히 분단의 경계선에서 평화와 화해의 봄 대신 대립과 대결의 겨울을 살고 있어서 오늘 이리 겨울비가 거센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통일은 정치적 수사나 선언만도 아니고, 감상으로 외치는 구호만도 아니고, 문화 예술로만 표현될 수도 없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다. 그동안 남과 북이 어우러져 빚어온 예술은 통일을 향한 정치 경제적 토대 위에서 더 빛날 것은 분명하다. 1972년 7월, 2000년 6월에 이어 2018년 9월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각 성명과 선언들에는 우리가 염원하는 통일의 원칙과 모습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기반하여 정전 협정과 평화 선언을 이루고 경제적 협력 관계를 튼실하게 꾸려가는 과정에서 우리 남과 북의 문화 예술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리라 믿는다.
요즘 우리 교육에는 '미래 교육'이란 말이 종종 등장한다. 4차 산업 혁명, 기후 환경 이런 단어들과 함께 미래 교육을 고민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미래 교육이란 말에 앞서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어떤 모습이고 싶은지에 대한 우리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우리가 지나온 분단의 시간에 대한 성찰과 우리나라의 통일은 미래 사회의 모습에서 중요한 전제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를 담보하기 위한 미래 교육에 평화로운 통일을 위한 교육이 미래 교육의 중요한 한 축이 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 교육 정책의 방향이 분명하길 또한 바란다. 평화통일 교육이 교사에 따른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민족의 평화와 화해 협력의 교육적 기조가 분명하고 이 기조가 담긴 정책의 방향이 교육의 구체적인 과정에 내용으로 담기면 좋겠다.
통일은 아이들이 꿈꾸는 미래의 영역을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역학자의 말처럼 물고기의 비늘에 바다가 스미듯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지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분단의 시간을 자기 삶에 새기며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독도를 포함하여 한반도 전체를 두고 자기 삶에 사회적 시간을 새길 수 있기를, 그래서 어떤 직업, 어떤 진로를 모색하든 그것이 한반도 전체를 두고 상상해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통일이 이토록 어렵게 오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라면 이 시절을 견디겠으나, 우리의 어려움이 누군가 이득을 보거나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유지하려는 데서 오는 것이라면 그들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방해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분명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 20년 전 그 조막손을 내밀어 오던 소년단의 아이는 어느덧 청년의 시기를 넘어 가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나자는 그 약속의 안부를 이 남녘의 교실에서 나에게, 그리고 그에게 묻는다.
- <칼럼> 늘봄학교,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다 '늘봄', 이 얼마나 예쁜 말인가? 봄처럼 포근하고 따사로움이 늘 함께한다는 뜻일 것 같은 '늘봄'. 그러나 이제 이 언어는 그렇게 쓰일 수가 없다.언어의 의미는 사회에서 규정된다. 아무리 좋은 언어라도 사회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언어의 오염이 시작되고 결국 그 언어는 이전의 의미로는 쓸 수 없게 된다. 나에게 '늘봄학교'은 '녹색성장'과 같이 그렇게 오염된 채 다가왔다.2024학년도 1학기 광주지역 늘봄학교, 신청에서부터 선정까지 학교 현장 갈등2월 현재 광주에서는 30여개 초등학교가 늘봄학교에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신청한 18개 학교 중 중17개교는 협의록이 없으며, 교장 결정 3개교, 교장과 교감이 함께 결정한 학교 1개교, 교장, 교감, 행정실장이 결정한 학교 2개교, 부장교사가 요청하여 승인한 학교 1개교 등 내가 속한 학교지만 어떻게 늘봄이신청되고 선정되었는지를 학교 구성원은 잘 모른다. 그래서 서로 의심하고 속상해한다. 이렇게 늘봄학교는 불필요한 학교 현장 갈등을 양산 시키고 있다.교사? 돌봄전담사? 일반직? 과도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어"우리가 일 때문에 늘봄학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늘봄학교 거부의 본질이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거겠지만, 노동자에게는 일도 중요하다. 여전히 시간제가 많은 돌봄전담사의 업무도 아니고, 수업과 생활교육이 고유 업무이자 이것만으로도 과도한 노동을 하는 교사의 업무는 더더욱 아니다. 늘봄지원실을 만들어 일반직을 배정한다는 것도 총액인건비제에 묶여있는 공무원 상황을 보면 실현 가능하지 의문이 들고, 기간제에게 맡기는 것 또한 노동의 불안정성을 부추김과 동시에 결국은 기간제 공고부터 선정 관리까지 다시 학교의 업무가 되는 것은 학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안다. 학교의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한다.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 강요받은 업무를 그것도 과도하게 말이다.가장 중요한 사실,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는 '늘봄학교'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늘봄학교에는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다는 것이다. 올해 초 늘봄학교에 대한 기사가 쏟아질 무렵 내 마음을 훅 치는 기사 하나가 있었다. 기사 중에는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자녀로부터 들은 초등돌봄교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엄마, 나는 초등학교 때 돌봄교실이 제일 싫었어. 다른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엄마랑 만나서 놀이터에서 놀고 학원에 가고 집에서 쉬는데, 난 혼자 돌봄교실에 갔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엄마랑 만나고 싶었어." 우리 아이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아침 7시부터 밤 8시까지 학교에 있는 게 폭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 안드는지? 어른들보고 그렇게 있으라고 한다면 아마 대다수 집에 간다고 하지 않을까?늘봄학교에는 주체인 우리 아이들의 목소리는 빠져있고, 즉 아이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고민과 사유는 실종되었다.학교, 지자체, 무엇보다 보호자가 우리 아이를 충분히 돌볼 수 있도록필자도 아이를 돌봄교실에 보냈었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발을 동동거린 적이 있다. 대한민국 보호자들이라면 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두 번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이 돌봄의 사회적책임이었고, 학교 현장에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돌봄의 사회적 책임은 보호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보호자의 양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노동시간 합의와 양육시간 확보도 해당될 것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것이 소위 '저녁 있는 삶'과 같은 것이다.학교가, 지자체가 함께 우리 아이들을 돌봄과 동시에 보호자가 우리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돌볼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천천히 가더라도 그렇게 가야 우리 아이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있다.그렇게 간다면 다시 '늘봄', 이 언어의 원래의 의미를 되찾아 진정 우리가 바라는 '늘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애숙 광주동산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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