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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유민주주의와 내전의 극복
입력 2021.08.06. 16:41 수정 2021.08.08. 19:55 댓글 0개올림픽이 끝났다. 근대 올림픽은 국력 경쟁의 한 가지 방식이다. 그저 각국의 대표 선수들이 경쟁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각국이 확보하는 메달 자체가 그 나라의 국력과 지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들은 측정될 수 있고 비교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경쟁한다. 이런 국가들의 경쟁은 아무리 치열할지라도 힘의 직접적 충돌을 대신하는 한 평화에 이바지한다. 세계대전이 벌어진 때에만 올림픽이 개최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올림픽이 전쟁의 대리물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 경기가 국가간 전쟁의 순화 형태라면 정당간에 치러지는 선거는 내전의 순화 형태이다.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를 통해 경쟁하는 정당들이 우열과 승패를 가리는 일이 전쟁과 같다는 것은 오늘날 선거운동을 가리키는 '캠페인'이 원래 전투가 벌어지던 평원과 그곳에서의 싸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선진 민주국가들의 선거를 통한 정당정치는 실제로 내전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내전의 주된 원인이었던 종교적, 민족적, 계급적, 지역적 차이는 정치적 경쟁의 요소로 바뀌었고, 세속화한 정당들은 내전을 멈추고 선거 캠페인을 시작했다.
선거를 통한 정당정치가 내전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한 번의 선거 결과가 승자와 패자를 영원히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에 의해 승패가 얼마든지 다시 바뀔 수 있다는 결과의 불확정성이 경쟁하는 당파들로 하여금 선거라는 규칙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므로 한 사회 내의 특정 집단에게 승자가 될 기회가 영원히 배제되는 경우 내전은 언제든지 발발할 수 있다. 민주화의 역사로 이해되는 참정권의 확대와 정당 활동의 자유 보장은 그런 위험 앞에서 내전을 피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조금은 덜 진지하고, 그래서 남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조금은 더 관용적인 세속적 정당들의 치열하지만 다분히 유희적인 경쟁 체제이다. 강한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 각자가 옳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을 잠정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철학적으로 그것은 분명 오류이고 신학적으로 그것은 심지어 죄악일지 모르지만, 근대인들은 이것을 '올바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존을 위해서 차선 또는 차악으로 선택했다.
"국민 여러분, 과거에 얽매여서는, 우리의 힘을 하나로 모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번영의 기초를 닦은 어르신들이 안심하실 수 있게,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한민국, 이제는 지긋지긋한 정치적 내전을 끝내야 합니다. 갈등을 극복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지난 4일 출마를 선언한 어느 대선예비후보의 말이다. 그는 지금이 일종의 내전 상황이고, 이 내전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 내전의 원인이 '권력의 단맛에 취해' '이념을 앞세워' 자유민주주의를 공격하고 시장 경제 원리를 훼손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떻게 내전을 끝내겠다는 것일까?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내전은 자동으로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반란 세력을 제거하고 소탕이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내전을 극복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세속적 당파들 간의 정치적 경쟁으로 순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하나는 자유주의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주의적 방식이다. 이 정권을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도 전체주의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은, 상대의 독선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독선을 간과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 후보는 자신이 법관과 감사원장으로서 '올바름'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지키겠다고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각자 인격적 수준에서 '올바름'을 주장하는 내전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고, '올바름'을 다만 절차적 수준에서 잠정적 결과로서만 인정한다. 지긋지긋한 정치적 내전을 이제 끝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정치적 경쟁에서 흔히 사용되는 호전적 수사에 불과하길 바란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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