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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구 호국·보훈 인물을 찾아서 박광옥

입력 2021.06.25. 13:58 댓글 0개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광주 서구의 호국보훈 인물 중 기억해야 할 인물은 누구인지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데요, 대표적인 인물이 임진왜란 의병장 박광옥(1526~1593) 선생이고 한말 항일 의병장 김원국(1873~1909)과 김원국 의병장의 동생 김원범(1886~1909) 그리고 대한 광복단 출신 독립운동가 김홍두(1879~1933)와 6.25전쟁 당시 공군 대위로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된 고광수(1929~1953) 등 5인입니다.

벽진 서원 전경 (사진제공 : 벽진서원)

오늘은 다섯 분 중 제가 여러 번 찾았던 서구 벽진서원(碧津書院)에 모셔진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선생을 소개합니다.

벽진서원은 올해 서구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는데요, 1호는 지난해 선정된 학산사로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김세근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 의열사와 벽진 서원 강당과 숭본당, 모현당, 관리동이 있으며 나주 남평에서 지석천 건너 서창 방면 도로를 시작으로 고싸움놀이 테마파크, 전평제, 서부농수산물도매시장, 풍암호수공원, 국제양궁장, 프라도호텔 위 사거리까지가 선생의 호를 따 회재로라 불립니다.

벽진서원은 그동안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살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고경명 장군의 포충사와 하서 김인후의 필암서원,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과 함께 사액 서원이었기 때문에 꼭 둘러보고 싶었는데요, 오늘 날 잘 잡은 것 같습니다.

1년에 음력 4월 24일과 음력 10월 26일 이렇게 두 번 제향행사가 있는데요, 오늘은 회재 박광옥 선생이 숙종에게서 도승지에 증직된 날로 광주향교 유림들이 주관한 행사이며 음력 10월 15일은 선생이 운명한 날로 본손들이 주관하는 행사입니다.

문은 열렸는데 아쉽게도 추모제향 봉행이 모두 끝나고 음복하는 시간에 도착했는데요,

벽진 서원 추모제향 사진은 벽진서원으로부터 제공받아 실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회재 박광옥 선생은 1526년(중종 21년) 1월 26일 광주 선도면 개산리(현, 서구 매월동 회산懷山마을)에서 성균관에서 음악을 지도하는 정 4품 사예(司藝)였던 곤(鯤)의 아들로 태어나 1568년(43세) 학행으로 천거돼 내시교관(종 6품)이 될 때까지 광주에서 살았는데요, 7살 때 부친을 여의고 묘 옆에 움집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습니다.

10세 때 조광조 제자였던 정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시작해 1546년(21세) 생원 진사시에 생원 3등, 진사 2등으로 합격했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요,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장성할 때까지 선생을 도왔던 형이 죽자 많은 재산과 함께 집안을 이끌고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1556년(31세) 회산 마을에 '개산송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광주향교 중수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데요, 1563년 광주향교가 중수되자 고봉 기대승이 전면 비문을 짓고 선생은 비석 뒷면에 음기 할 정도로 광주 유림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가뭄으로 고통받는 마을 주민들 구휼에도 앞장서 사재를 털어 둑을 쌓고 물을 가둬 저수지(개산 방죽)로 활용했으며, 방죽 위에 수월당 정자를 짓고 기대승, 박순, 고경명 등 당대 학문으로 명망이 높았던 사람들과 함께 학문으로 교유했다고 합니다.  

회재(懷齋)라는 호도 회산 마을에 서실 두 칸을 지어 후학을 기른 데서 시작했는데요, 해남 윤선도와 보성 안방준과 함께 호남 3대 부자였다고 합니다.

사진제공 : 벽진서원

박광옥의 교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이, 노사신 등과도 교류했으며 특히 영산강변을 따라 김언거(1503~1584)의 풍영정이 있는 풍영정 나루와 개산송당이 있는 벽진 나루를 자주 오가며 나이를 떠나 깊은 우정을 나눴다고 합니다.

사진제공 : 벽진서원 

선생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1568년(43세) 학행으로 천거돼 내시 교관으로 나선 것이 시작인데요, 이어 1574년 별시문과에 합격해 종부사주부, 운봉 현감에 제수되었습니다. 운봉 현감 때인 1577년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전공비를 세웠지만, 일제 강점기 남원 경찰서 일본 형사들이 폭파시켜 버려 현재는 파비로 보존되어 있으며, 가는 임지에서 임기를 마칠 때마다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울 정도로 위민봉사했다고 합니다..

사진제공 : 벽진서원 

1578년 춘추관 기사관 1578년 전라도와 충청도 도사, 예조정랑, 1580년 사헌부 지형, 성균관 직강, 성절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가 황제를 접견했고 1581년 대사헌, 영광 군수 등을 지내다 신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산을 털어 고경명, 김천일 장군 등과 의병을 모집해 의병 도청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했으며 전라감사 권율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워 나주목사로 재임하다 1593년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진제공 : 벽진서원 

1593년 선생이 운명하자 1602년 후학들이 벽진사를 건립해 선생을 배향했는데요, 1604년 벽진서원으로 개명했다가 1678년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합향하고 1681년 의열사(義烈祠)로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7년 후손들이 선생의 묘소 옆에 운리영당을 세우고 선생이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요, 운리영당이 도시개발 지역으로 편입되자 1999년 묘소를 이장하고 그 옆에 운리사를 세웠으며 지역 유림들과 학자들의 요구로 2018년 현 위치에 벽진 서원을 신축하고 운리사의 영정과 위패를 옮겨 모셔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벽진서원 의열사 내부에는 선생의 영정과 위패 그리고 회재집 목판이 있습니다.

모두 2권 1책으로 된 회재집은 1847년 종 7대손 승언이 편집해 간행한 목활자본으로 현재 전남대학교 도서관에 보존되었으며 회재유집목판은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23호입니다.

회재집 1권은 시 327수, 2권은 서 2편, 기 1편, 봉사 1편, 연보와 정포상소, 의열사 중수 상량문, 청시상소, 행장, 보유, 유상개모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요, 선생의 상소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사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합니다.

오늘 도움 말씀에는 회재 박광옥 선생의 25대 손인 음성박씨 정승공파 박상배 종친회장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지금의 풍암지구 등에 상당한 면적의 땅이 음성박씨 문중 땅이었다는데요,

조선시대 호남 3대 부자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뭄에 시달린 지역사회를 위해 방죽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광주향교를 중수하는데 보탰으며 나머지 재산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모집하는 데 사용했다고 하니 조선시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분이고 하겠습니다.

사진제공 : 벽진서원 

음력 4월 24일 광주향교 유림들이 주관이 된 향사에 수고해 주신 분들 사진입니다.

벽진서원은 광주 포충사(고경명 장군)와 필암서원(김인후), 월봉서원(기대승) 등과 함께 사액 서원입니다.

1678년 김덕령 장군을 합향하고 1681년 4월 24일 숙종 임금에게 의열사라는 사액을 받았는데요, 당시 예조 좌랑 이정린이 광주까지 파견돼 제관을 맡았으며 선생은 도승지에 증직 되었고 김덕령 장군은 병조판서에 증직 되었습니다.

현재 사액 내용이 담긴 사제문 현판은 광주 향교 유림들의 회의가 진행 중인 숭본당에 걸려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회재 박광옥 선생에 대한 후진 양성 칭찬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하며 군량미를 조달 한 것에 대한 감사와 죽음을 애통하고 김덕령 장군의 임진왜란 활약상과 함께 무고로 희생된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사당의 편액이 없던 차에 나라에서 편액과 함께 제물을 올리고 예관을 보내 정성을 다해 우러러 존경한다는 내용입니다.

현재 회재 박광옥 선생의 벽진서원은 1년에 2번 향사를 지내기에 내부를 들여발 볼 기회는 서구청 지방보조금 지원사업인 '청소년 인성교육'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전통생활다례'강좌 때 입니다.

'청소년 인성교육'은 6월 10일, 17일, 24일 15시부터 16시 30분까지 진행하며 다도예절과 행다법, 선비체험, 투호놀이와 협동정신을 강의합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전통생활다례'는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요, 6월 9일부터 8월 4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11시 50분까지 진행합니다.

나만의 찻잔 만들기, 다식만들기, 자수가 있는 다건 만들기, 다구 종류 및 용도, 제다현장체험, 생활의식다례 행다법 등 고품격 다례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에 벽진서원도 함께 들러보세요.

문의는 벽진서원 062-682-8755, 010-63337-1000 번입니다.

회재 박광옥 선생의 묘소는 벽진서원 모퉁이를 지나 동부센트레빌 쪽으로 금당산 둘레길을 따라 300m 정도 떨어진 황새봉 산기슭에 있습니다.

선생의 묘소가 맨 아래에 있는 걸로 봐서 선생의 3대 조까지 모신 선산으로 보이는데요, 묘소 관리가 정말 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음성박씨는 신라 경명왕 넷째 아들 박언립의 11대 손 박서(朴犀)를 1세로 합니다.

박서는 원래 죽산 박씨였으나1231년 고려 시대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군을 대파한 공으로 벼슬이 문하사링 평장사에 올랐고 음성백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음성으로 했다는데요, 정승공파는 고려 말기 5세에 이르러 고려 말기 사재감정 보문각 직제학 첨의 정승을 지낸 정승공 원(洹)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충의를 지키려고 처가인 정읍으로 낙향했고 아들인 고려 예문춘추관 한림인 계양(繼陽)이 광주로 세거지를 옮겨 산 것이 광주 음성박씨 정승공파의 시작입니다.

회재 선생의 묘소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산은 선생이 태어난 개금산이며 그 넘어가 선생이 재산을 털어 만든 개산 방죽이 있는데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광주 서구의 호국보훈 인물을 찾아 나선 뜻깊은 탐방이 되었습니다.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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