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개업 3일만에 계엄군 구타로 몸 상해···내 인생 어이하오"

입력 2021.05.23. 14:45 수정 2021.05.25. 17:25 댓글 0개
광주 북구 오치동 거주 부상자 최정아씨
딸 잃은 아픔 딛고 다방 개업 3일만에
5·18 발발, 중증 장애·한쪽 고막 상실
올해 처음 동네 부녀회 찾아와 위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부상을 안고 살아온 최정아(86·가운데)씨를 광주 북구 오치2동 새마을 부녀회 회원들이 5·18 41주년을 맞아 처음 방문해 위로했다.

"세상이 좋아지고 5·18 공법단체가 생긴들 무엇하오. 한 평생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5·18 행사 가보지도 못하오. 그날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내 인생은 그대로 끝나 버렸소. 그런데 전두환이 호의호식하고 재판은 나오지도 않으니 이 속을 누가 알겠소. 그래도 동네 분들이 이렇게 위로해주러 오니 고맙고 눈물이 나요."

1980년 5월 18일 오후 5시. 그날은 권투선수 박찬희가 5차 방어전이 예정된 날이었다. 광주 북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 중앙상호신용금고 지하에 위치한 삼원다방에서는 사장 최정아(여·당시 45세)씨와 주방장 이병의(당시 34세)씨, 아가씨 대여섯 명이 경기 방송을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삼원다방은 사장 최씨가 아픔을 딛고 개업한 가게였다.

4개월 전인 1월 최씨는 스물두살 큰 딸을 하루아침에 잃었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딸을 떠나보내고 곡기를 끊었다가 남은 두 아들을 생각해 다시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3일 전인 15일에 1층의 중앙상호신용금고에서 돈을 인출해 직원들에게 선불까지 해가며 가게를 개업했다.

다시 삶의 희망을 이어간 지 불과 3일만에 국가폭력이 최씨를 덮쳤다.

계엄군이 시위대를 쫓아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면서 삼원다방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셔터문을 내리려던 찰나, 군홧발이 셔터를 가로막았다. 이어 "문열어"하는 소리와 함께 셔터를 올린 계엄군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곤봉으로 다방에 있던 이들을 후드려팼다.

어안이 벙벙한 최씨의 얼굴을 향해 곤봉이 날아들었다. 쓰러진 최씨의 두 팔과 무릎, 등짝으로 곤봉 세례가 이어졌다. 결국 한쪽 고막도 파열됐다.

충격으로 3개월을 정신과 치료를 받느라 밤잠을 못 잤다. 구타당한 어깨와 관절이 틀어져 초대형 파스를 온몸에 붙이고 산지가 41년이다. 두 팔과 무릎은 힘이 들어가지 않고 엉덩이는 41년간 주사를 맞아 만신창이다.

이제는 뇌경색으로까지 증상이 커졌다. 장애인 택시를 이용하지 않으면 이동하기도 어렵다. 5·18 행사는 고사하고 국립 5·18 묘역에 가 본적도 없다.

남은 돈 탈탈 모아 오치동의 영세민 아파트에 산 지가 20년이 넘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자식들을 건사하지도 못해 지금도 힘든 일을 전전하는 아들들이 눈에 밟힌다.

찾아오는 이 없이 고독과 고통에 시달리는 최씨에게 41주년 5·18을 맞아 처음으로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오치2동 새마을부녀회는 지난 18일 찾는 이 없는 최씨의 집을 방문했다. 동네에 5·18 부상자가 홀로 외롭게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배점자(63) 회장과 회원들이 찾아온 것이다.

배 회장 또한 5·18의 사연이 있다. 5월 20일 지금의 남편과 데이트를 하던 그는 계엄군을 마주치고 숨어 있다 한밤중에 겨우 귀가했다. 위기를 넘겼음에도 다시 거리로 나가 총을 가지러 가는 시민군에 합류했다.

배 회장은 "5·18의 고통으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다"며 "이제 매년 동네에 사는 5·18 피해자들을 찾아 돌봄 활동을 하려 한다"고 전했다.

최씨는 "5·18 유공자가 괴물집단이고 세금 축낸다던 자유한국당이 아직도 생각난다"며 "내 삶을 보고도 괴물이란 말이 나오나. 한스런 삶 늘그막에 찾아와 위로해주는 이들에 고마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한편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장해 등급을 받은 5·18 부상자는 2천205명이다. 1급 24명, 2급 10명, 3급 18명, 4급 11명, 5급 37명이며 14급이 1천145명으로 가장 많다. 서충섭기자 zorba85@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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