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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1세기 노인 생활
입력 2021.04.30. 15:48 수정 2021.05.02. 19:11 댓글 0개1970년, 오뉴월의 풍경은 대개 이러했다. 이른 새벽, 어머니가 가장 먼저 일어나 수돗가나 냇가에서 밀린 빨래를 한다. 빨래가 끝나면 아침 준비다. 너댓쯤 되는 아이들 도시락도 손수 준비한다. 아버지는 그 사이 논을 한 바퀴 둘러보고 모 심을 채비를 한다. 할머니는 굽은 허리로 텃밭에서 김을 매거나 상추, 열무 등속을 솎아 다듬으며 일손을 돕는다. 맏이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살피고, 초등학교 다니는 둘째나 셋째는 학교 가기 전 소 풀을 뜯기러 들로 나간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바지런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노인들도 큰소리칠 수 있었다. 거동만 할 수 있다면 노인들도 새끼를 꼬든 싸리 빗자루를 엮든 떨어진 나락을 줍든 무엇이라도 해서 살림살이에 보탰다.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 짚은 채 종일 들을 헤집으며 꺾어온 각종 나물은 빈약한 밥상을 넉넉하게 채우기도 하고, 장에서 팔려 손자들 공책값이 되기도 했다. 거동조차 힘든 노인이라도 농사일에는 쓸모가 있었다. 농사일은 변화가 더디고 노인들의 오랜 경험이 큰 도움이 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체한 손자 손 따는 데, 배 주물러 체증을 내리는 데도 오랜 연륜의 할머니 손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 노인들은 늙어도 당당했으며, 꼬장꼬장 할 일 다 하고 할 말 다했다. 자식의 봉양을 받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시절, 노인들은 늙어도 외롭지 않았다.
요즘 시골에는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다. 기껏 고생해 가르친 자식들은 출세를 했든 못 했든 죄 돈벌이 많은 도시로 나갔다. 도시에서 먹고 사는 일이 만만할 리 없어 일 년에 서너 번 볼까말까다. 자식들 어려서 식성 생각해 늘 먹고 자랐던 각종 산나물이며, 농약도 안 치고 정성으로 키운 채소, 바리바리 택배로 보내는 게 요즘 시골 노인네들의 일이다. 나 역시 서울 살 때 이주가 멀다고 어머니의 택배를 받았다. 늙은 부모들은 모른다. 서울살이 팍팍하여 하루 한 끼조차 집에서 먹기 어렵다는 것을. 요즘 사람에게는 나물 요리가 얼마나 번거로운가를. 그래서 어머니가 보낸 각종 나물이 대부분 까만 비닐봉지에 담겨 냉동실에 처박혔다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진다는 것을.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라 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농경산업이 근간이었고, 농사는 공동체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어느 집이나 식구가 많았다. 밥 사먹을 돈도 없고, 외식할 만한 식당도 많지 않아, 그 많은 식구가 하루 세끼 머리 맞대고 앉아 밥을 먹었다. 여성들의 고된 노동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밥상머리에서 숱한 추억들이 만들어졌다. 그 시절의 어머니를 경험한 사람들은 삭막한 도회로 나가 어머니의 된장찌개와 헌신적인 사랑을 그리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화의 속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근대의 속도에 적응하고 21세기 들어 젊은 사람들조차 현기증이 날 지경인 정보혁명의 시대에 적응 중인 자식들을, 고향의 부모는 여전히 전근대의 속도로 기다리는 중이다. 그래서 70년대의 부모와 달리 21세기의 부모는 한없이 외롭고 무력하다.
열 명의 식구가 북적거렸던 밥상 앞에 이제 남은 건 부부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다. 둘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둘을 위해서는 요리를 하지만 혼자를 위해서는 요리를 잘 하지 않는다. 한두 가지 대충 차려 대충 먹는다. 몸은 아직 움직일만한데 돈 되는 농작물이나 농사법은 매년 달라져 따라가기 어렵다. 그저 짓던 농사 그대로 짓는 수밖에 없다. 익숙한 오일장은 해마다 규모가 줄고 알던 얼굴은 사라져간다. 마트에 가면 체온을 재라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고, 젊은 애들은 휴대전화 갖다 대면 끝나는 걸 전화번호며 이름이며 주소며 일일이 손으로 적어야 한다. 무언가 뒤처진 느낌,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읍내나 시내에 나가면 매번 그런 기분이 든다. 익숙하고 편안한 곳은 오직 내 집, 내 땅. 이제 그 땅도 힘에 부친다. 그래도 그 땅 놀릴 수 없어 지긋지긋한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가끔은 그립다. 먹을 것도 없고 죽도록 힘만 들었던 그때가. 온 식구 상에 둘러앉아 계란찜 한 번 더 먹겠다고 아귀다툼하던 그때가. 늙은이라도 쓸모 있던 그때가.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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