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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개인의 시대
입력 2021.03.26. 15:22 수정 2021.03.28. 20:03 댓글 0개사춘기였던 우리에게 권리 같은 건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와 교사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고, 어른들에게 몇 대 얻어맞는 것쯤은 당연한 줄 알았다. 교복, 귀밑 2센티미터의 단발머리, 감색이나 검정색 운동화, 군복 같은 교련복, 제식훈련, 한 여름 땡볕 아래 한 시간 넘도록 끝나지 않는 교장선생의 훈화, 학생이라면 누구도 거부해서는 안 되는 의무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양말 접는 간격까지 규제당했고, 남성의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올인원(위에서 아래까지 연결된, 혼자 힘으로 입고 벗기조차 어려운 거들) 착용을 강제당했다. 어디서도 우리의 권리를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그런 규제가 답답했지만 거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사춘기의 우리들은 어린 우리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40년 전,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풍속도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개인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 미성년자들은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아동복지법이나 청소년법에 의해 가정과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내 자식이라고 해서 함부로 때리거나 굶기거나 정서적으로 학대할 수 없다는 의미다. 노동자들 또한 노동법에 따라, 여성들은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존중받을 수 있다. 물론 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완전히 보호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가 멀다고 학대받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희롱당하고 추행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뉴스를 도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인의 권리가 이전보다 확장된 것만은 명백하다.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개인 권리의 확장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까지 노예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마저 갖고 있지 않았다. 개인에게 거주이전의 자유조차 없던 시절이 있었고, 신분에 따라 교육조차 받을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근대 이전까지 귀족 계급이 아닌 개인은 한낱 노동력에 불과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개인의 권리가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SNS나 블로그,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의 탄생과 성장에 힘입어 개인의 힘과 권리는 더 강력해지고 있다. 잘 먹는 것, 많이 먹는 것, 화장 잘 하는 것, 음식이나 의자나 뭐든 잘 만드는 것, 예전이라면 재능으로 인정받기는커녕, 공부도 못하는 게 밥만 처먹는다고, 화장이나 한다고 욕이나 얻어먹었을 사소한 개인의 특성이 소셜 미디어의 세계에서는 돈이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한다. 사소한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것으로 돈도 벌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인정하는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이다.
염려가 없지는 않다.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모든 권력은 타락하고 부패한다. 개인의 권력 또한 마찬가지다. 블로그에 좋은 평을 써줄 테니 공짜로 음식을 달라거나 뒷돈을 요구하는 블로거나 유튜버들의 이야기가 이미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뜻밖의 떼돈을 번 아프리카 BJ들이 마약에 빠지거나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기사 또한 자주 접할 수 있다. 개인의 권력은 공적 권력과 달리 강제할 사회적 장치가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세상이 원하는 뻔한 가치(학벌, 집안 등)를 따르지 않고도 누구나 유명해질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다니, 참으로 통쾌하지 않은가!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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