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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5·18과 덕의 변증법
입력 2021.03.19. 12:43 수정 2021.03.21. 19:59 댓글 0개5·18을 우리는 시민들의 덕이 표출된 사건으로 기억한다. 항쟁의 기간 동안 시민들은 서로 도왔고 각자가 가진 것을 나누었다. 고립 속에서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주었고 서로 나누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시민들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공동체를 위해,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참으로 덕의 공동체였고,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그런 공동체로서 모범이 되었다.
최근 그리 유쾌하지 않은 보도들이 이어졌다. 지난 1월, 5·18민주유공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공포됐다. 5월 단체들이 바라던 바였다. 이에 따라 사단법인인 세 단체(구속부상자회, 유족회, 부상자회)는 해산하여 각각 공법단체로 재설립될 예정이다. 그런데 공법단체 설립 과정에서 내부 갈등이 생겼다. 서로 다투다가 심지어 '가짜 유공자'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없던 갈등이 이렇게 새로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공법단체가 되면 할 수 있는 수익사업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한때 공동체를 위해 덕을 발휘하며 희생했던 시민들이 이제 덕을 상실하고 물질적 이익 앞에서 서로 다툰다는 상투적 비판처럼 들린다. 물론 덕과 이익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은 5·18유공자와 그 자녀들이 마치 온갖 부당한 혜택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비방한 사람들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익이 숨어 있음을 폭로함으로써 어떤 행위가 마치 도덕적이지 않은 것처럼 공격하곤 한다. 그러나 사익을 포기하는 것이 그 자체로 도덕적인 것이 아니듯, 도덕적이기 위해 반드시 사익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익을 위해 사익을 포기하는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지만, 누가 공익을 침해하지 않는데도 사익을 추구한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가 5·18유공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성직자들이 경제적 이익을 탐하지 않고 직분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경제적 문제를 종교 공동체가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5·18유공자들이 경제적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그것은 우리 정치 공동체가 그들의 경제적 필요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권력을 추구하고 경제적 이익을 탐한다면,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이미 사익 추구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5·18유공자들이 이권을 두고 다투는 이유도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덕이 가져온 성공이 다시 덕의 타락을 가져온다는 것은 정치사상사의 오래된 주제이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살루스티우스는 공화정 말기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마 시민들의 수고와 정의에 의해 공화국이 성장하고 위대한 왕들이 전쟁을 통해 복속되고 야만적인 부족들과 큰 인민들이 힘에 의해 정복되고 로마 지배의 경쟁자 카르타고가 뿌리째 뽑혀 모든 바다와 땅이 열리자 운명의 여신이 사납게 날뛰고 모든 것을 뒤섞기 시작했다. 노고와 위험, 불확실하고 힘든 상황을 쉽게 이겨낸 자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바라던 여가와 부가 주어지자 이제 짐과 고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배에 대한 욕망과 돈에 대한 욕망이 자라났고, 그것들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되었다. 탐욕은 … 오만과 잔인을 가르쳤고, 신을 불경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쳤다. 야망은 필멸의 존재들에게 많은 거짓을 행하게 했다. 어떤 것은 마음속에 숨기고, 또 어떤 것은 말로 밖에 드러내게 했다. 친구와 적을 사실이 아닌 이익에 따라 구분하게 했으며, 좋은 성질보다 좋은 외모를 더 중시하게 했다. 이 욕망들이 처음에는 천천히 자라나다가 이따금씩 배척되기도 했지만, 병폐가 마치 전염병처럼 침입한 뒤에는 시민 전체가 변했고, 가장 정의롭고 좋던 지배는 잔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이 발휘한 덕과 그것을 모범으로 여긴 대한민국의 많은 시민들이 함께 발휘한 덕을 통해 지금과 같은 부강한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그 덕이 가져온 성공으로 인해 다시 쇠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배와 돈에 대한 욕망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 한때 덕스러웠던 시민들을 변하게 하고 있다. 덕의 변증법이 공동체가 몰락한 뒤에 질서가 생겨나고 그 질서에서 다시 덕이 생겨난다고 말한다면, 위대한 정치가는 시민의 덕을 재생시켜 공동체의 몰락을 막는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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