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더니

‘내게도 있던 한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여행/공연장터의 삶, 장터의 맛 (5)능주시장


지업사에서 쌀도 팔고, 쪽파도 팔고, 씨앗도 팔았고, 씨앗가게에서는 고구마도 팔고, 소금도 팔고, 미역줄기도 팔았다. 식품가게에서도 장갑도 팔고, 비닐봉투도 팔고, 비누도 팔았다.

능주시장의 가게들은 근본을 지키면서도 품목의 경계를 상호간에 조금씩 허용했다. 장이 서는 날, 5일 만에 만나는 상인들은 ‘밤새 안녕 하셨냐’ 는 듯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반겼다. 간간이 건너편 튀김집에서 따끈한 튀김 몇 개 사와서 나누고, 점심시간이 되면 주문한 국밥을 앞에 놓고 옆 가게 주인을 불렀다.

얼마 전에는 미곡가게가 문을 닫았고, 오늘 장에는 튀밥 튀는 김씨가 나오지 않았다. 상인들은 오늘이 다음 장에서도, 내년 장에서도 옆 가게 주인과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품목을 내어주고 국밥그릇에 수저를 함께 넣었다.


장터 입구에는 섣달의 햇살이 묘목상의 밀감나무에 걸려 익어갔다. 노란 열매를 두 세 개씩 매단 밀감나무와 비파, 천리향, 보리수, 꾸지뽕, 앵두, 석류, 단감 등의 어린 나무들이 추운 뿌리를 비닐봉투로 감싼 채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양지쪽에 섰다.

70대의 묘목상 아주머니는 능주장과 화순장, 나주세지장 등 세 군데의 정기시장을 30년 째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 때는 능주장이 북적북적했는디…”

◆ 꽃가마타고 시집가던 날

아주머니가 30년 전으로 돌아가려 할 때, 젊지도 늙지도 않은 부부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애기동백 한 그루를 집어 들었다. 아주머니가 “옛날, 꽃가마타고 시집갈 때는 이 꽃으로 화환을 만들곤 했다”고 설명했다.

부부가 2만5천원을 내밀었다. 애기동백의 가슴에는 ‘3만원’이라고 쓰인 딱지가 명찰처럼 붙어 있었다. “오매! 못살 것네. 삼 만원 짜리랑께…”하면서도 묘목상 아주머니는 웃었다.

나도 덩달아 귤 3개가 달린 밀감나무를 가격표보다 5천원이나 싼 가격에 한 그루 샀다. “아파트에서 키우려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두시오. 밀감 꽃 향이 참 좋아라우”

능주전통시장의 역사는 조선시대 후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공식적인 개설은 일제시절인 1923년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화순군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다. 인접한 광주 남구쪽 시민들과 화순군의 도곡 도암 한천 춘양면 주민들이 주로 이용한다.

1980년 때까지만 해도 우시장과 어물전으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우시장도 사라지고 많이 쇠락했다. 2000년 후반 들어 점포의 30%가 문을 닫으면서 현재는 50여개의 점포에 90여명의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그나마 60세 이상의 상인들이 60% 이상이다.

능주전통시장 상인회 변영준(81) 회장은 “정부와 자치단체에서는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효과가 지역단위까지는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며 “면단위 차원에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재래시장 장보기 캠페인을 해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능주의료원에서 근무했던 일이 인연이 돼 능주가 처가동네가 됐고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는 변 회장은 떡가게를 운영한다고 했다. “떡집? 아, 떡집도 한 시절엔 웃음꽃이 그치지 않았지요. 시방이야 뭐 비교나 할 수 있나요.”


◆ 일찍 나온 보리새싹

그는 한 시절 광주나 나주 등과 함께 ‘목사고을’로 불리며 위세를 떨쳤으나 지금은 면단위로 전락한 능주의 역사와 능주시장의 역사가 어쩌면 이리도 닮았느냐고 했다.

과일가게에는 고흥산 첫 유자가 나오고 노점에는 보리새싹이 나왔다. 주먹 만 한 유자는 20개 정도 들이 한 바구니에 1만원에 팔렸다. 유자는 보통 음력 10월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수확하는데 이른 셈이다. 올해는 태풍이 비껴가고 여름 햇살도 좋아 모든 과일이 일찍 나왔다고 과일가게 주인이 말했다.

보리새싹도 유자처럼 지난 계절이 좋아서 일찍 나온 것일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금했다. 노점 아주머니는 “지금이 보리파종을 할 시기이지만, 이것은 보리순을 팔기 위해 일찍 파종했던 것”이라고 했다.

유자로 차를 만들면 가버린 계절의 아쉬움이 노랗게 물들고, 보리싹으로 된장국을 끓이면 오게 될 계절의 그리움이 파랗게 피어날 것 같았다.

능주전통시장에서 경쟁자 없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점포가 두 군데 있다. 반찬가게와 튀김집이다. ‘소희네 반찬가게’의 고객은 장보러 오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능주시장의 상인들도 단골 고객이다. 김치겉절이와 간장게장, 콩자반, 더덕장아찌, 오징어젓, 송어젓 등 30여 가지의 밑반찬을 가게 주인이 직접 만들어 판다.

반찬가게와 이웃한 튀김집에서는 새우, 오징어, 고구마, 야채, 잡채, 식빵 등의 튀김이 10개에 3천원이다. 손님이 취향에 따라 골라 담으면 된다.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는 요즘의 환절기 장터에서는 여느 시장이든지 옷가게가 인기다. 지금이야 백화점은 물론이고 텔레비전에서도, 핸드폰에서도 옷을 팔지만 어린 시절의 옷가게는 장터가 최고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실제 키보다 한 치수 더 큰 옷을 사오셨고, 형아 옷 같던 옷이 제법 몸에 맞을 때쯤에는 옷의 무릎이나 팔꿈치에 비슷한 색의 헝겊이 덧대어졌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오시던 옷만큼 어린 소년을 설레게 했던 것이 또 있을까 싶다.

◆ “이녁이 좋아야지…”

세월이 지났지만 시골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옷은 아직도 장터에서 사는 것이 정석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아낙이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옷 사드리러 왔나 보다. 아까부터 몸은 바짝 마르고 허리는 45도쯤 앞으로 기울은 할머니가 빨간색과 보라색 패딩잠바를 번갈아가며 가슴에 대어보고 있다.

할머니가 빨간 패딩을 가슴에 대자 두어 걸음쯤 떨어져 있던 사위가 “그거 입으시오”라고 했다. 사위의 추천에 할머니는 “이녁이 좋아야지…”라고 혼잣말처럼 내뱉더니 이번에는 보라색 패딩을 오랫동안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사위의 추천은 할머니의 마음을 꿰뚫지 못했다. 딸이 4만5천원 달라는 보라색 패딩을 4만원에 샀다. ‘울 엄니는 무슨 색깔을 좋아하실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옆집 옷가게에서도 외국인 총각 둘이 가격을 놓고 주인과 흥정을 벌이고 있다. 동티모르에서 한국에 온지 8개월 됐다는 아담(22)과 그의 친구라고 했다. 아담이 회색 후드 집업티와 곤색 기모 츄리닝 바지 하나씩을 포개들고 ‘이 만원’이라고 연신 짧게 말했다. 옷가게 주인아주머니가 웃음을 머금은 채 ‘삼 천 원만 더’라고 받았다. 흥정은 2만2천원에 끝났고 아담이 카드를 내밀었다.

흥정의 손익을 계산해 보니 ‘손’은 없고 모두 ‘익’이다. 아담은 가게 주인이 맨 처음 ‘이만 오천 원’이라고 했던 옷을 ‘2만2천원’에 샀으니 ‘3천원’을 아꼈고, 가게 주인 역시 ‘이 만원’을 고집하던 아담이 ‘2천원’을 더 썼으니 그만큼 남는 장사를 했다. 정찰제에서는 볼 수 없는 시장만의 셈법이다.

오는 길에 차를 돌려 시장 건너편의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 유허지’를 찾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오지는 못하더라도 오는 길에는 기억하여 들리는 것이 조선 선비에 대한 예일 듯 싶었다. 정암이 ‘조(趙)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의 모함 등을 받아 귀향 온 뒤 사사(賜死)된 곳이다.

영정각에서 만나는 젊은 사내의 형형한 눈빛이 시리다. 그가 사약을 앞에 놓고 임금이 있던 곳을 향해 큰절을 올렸던 북향 멀리에 무등산의 서석대가 금부도사가 말을 달려 사약을 갖고 오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초겨울의 햇살에 반짝인다. 조영석/시민전문기자(kanjoys@hanmail.net)

‘아, 맛나~’

능주시장에는 식당이 2개 있다. 추어탕집과 국밥집이 시장 안쪽 상인회사무실과 인접해 있다.

그중 남도추어탕의 간판이 달린 집을 방문했다.

미꾸라지는 자연산과 양식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섞어서 사용한다. 자연산으로만은 수요를 충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시레기와 된장은 만들어 사용한다. 시레기를 많이 사용한 탓에 여타 추어탕맛에 비해 시원한 맛이 강하다. 한 그릇 7천원이다.

목이었던 능주, 목을 놓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능주(능성)는 한 시절 전주와 광주(무주), 나주(금성) 와 함께 전라도에 있던 4개 목사고을 가운데 하나였다. 인조의 모친인 인현왕후의 성향(능성 구씨)이라 하여 인조 10년이던 1632년 목으로 승격했다. 이후 264년 동안 목사가 부임한 곳이다.

능주는 목사고을이 되기 전에도 종 5품이던 현령고을이었다. 반면 화순과 동복은 종 6품의 현감고을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능주는 군단위이고 화순과 동복은 면단위다.

1700년대 중반만 해도 능주의 인구가 화순과 동복의 인구를 합친 것 보다 많았다. 능주는 5천33호에 1만9천650명(2016년 기준 3천571명)이 살았으나 화순은 1천715호에 5천777명, 동복은 2천106호에 7천390명이 살았다. 더구나 1908년에는 화순군이 능주군에 편입됐으나 1913년 일제에 의해 능주와 화순, 동복이 통폐합되면서 목을 놓고, 군도 놓고, 결국은 면이 되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