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더니

가을에서 겨울로… 인적 드문 숲길에서 인생을 보다

여행/공연화순 너릿재 옛길

사랑방신문·광주매일신문·광주평화방송 공동기획

남도 힐링 명소를 찾아서

광주 길은 아스팔트로, 화순 길은 자연 그대로
해발 240m 야트막한 고개 마지막 단풍도 장관

 

너릿재 옛길을 오르는 날, 새벽에 무등산 국립공원 정상에 첫눈이 내렸다. 고개 입구에서부터 약한 비가 뿌리더니, 중간쯤 이르러 싸락눈으로 변했다. 또 진눈깨비로, 그리고 이내 소낙눈이 돼버렸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길 양쪽으로 제법 눈이 쌓였다. 연인 사이에, 가족 간에, 친구끼리 그럴싸한 기념일로 설레는 만남을 갖게 하는 첫눈 오는 날이다. 여행이라는 것이 뜻밖의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인적 드문 산중에서 색다른 경험에 휩싸인다.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고 있다.

 

산중에서 맞는 첫눈…색다른 경험

 

 

 

 여태껏 울긋불긋 물든 단풍은 그 색이 더욱 진해지고 있다. 무수히 지났을 발걸음들에, 차량들에 밀려나 길 옆으로 누운 낙엽은 추위를 버티듯 뒤엉켜 있다.


급전직하한 날씨 탓에 마음이 급해지지만, 애써 느릿느릿 걷다 보면 아주 오래전 오롯이 흙길이었을 이곳에서 소소한 재미가 느껴진다.


광주를 가기 위해, 화순을 가기 위해 선조들이 만들고 걸었던 길이다. 광주에서 오르니 아스팔트로 반듯이 포장한 신작로가 이어진다. 좌측으로 잘 정비된 배수로도 눈길을 끈다. 군데군데 야생화 군락지도 나름으로 조성돼 있다.


비비추, 털머위, 영산홍, 수국, 꽃무릇 등 화사한 꽃은 이미 지고 없으나, 화려한 봄날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광주 길은 그런대로 인공이 가미된 아름다움을 갖췄다.


반대로 경계인 화순 길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과 자잘한 돌들로 단장하고 있다.


이 산 저 산 어디든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고개다. 힘들어도 오르고 나면 또 내리막이고, 이어 오르막이니 당연지사다. 인생사 마찬가지일 게다.

 

선인의 흔적 스며든 유서 깊은 흙길

 

너릿재는 화순의 진산인 만연산과 안양산을 거쳐 무등산을 잇는 백두대간 호남정맥의 지맥을 따라 형성돼 있다.


1971년 터널이 뚫려 차량 통행이 이어지고 있다. 어김없이 출퇴근 시간이나, 곧 닥쳐올 겨울 폭설 때도 엉금엉금 꼬리를 물어야 하니, 참으로 ‘넘기 쉽지 않은 고개’라는 사실에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명의 유래를 보자. 1757년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 도로편에 ‘北距光州界板峙距路九里(북거광주계판치거로구리)’ 기록이 등장한다. 이후 출간된 읍지에도 계속 ‘판치(板峙)’ 라는 지명으로 기록돼 있다. 삶의 애환과 역사를 갖고 있는 유서 깊은 고갯길이다.


당시에는 광주와 화순 읍내 사이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넓게는 광주와 전남 동부권을 연결하는 길목이다.


그래서일까. 너릿재는 죽음과 결부된다. 1519년 정암 조광조는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개혁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능주 유배길에 이곳을 넘었다가 얼마 뒤 사사됐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은 아니었다. 숱한 사람들도 원치 않게 이곳을 넘었고 원치 않게 생을 마쳤다.


아주 먼 옛날부터 수없이 넘고 또 넘어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사연들도 상당했을 터이다. 산적이나 도적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구전에서도 이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죽임을 당해 판, 즉 널에 실려 너릿너릿 내려온다고 해서 ‘너릿재’라고 붙여졌다 한다.

 

제법 반반한 등성이 ‘너른 재’ 명명

 

그렇다고 역사의 비극과 아픔만을 보듬은 것만은 아닐 듯싶다. 길이 가파르고 구불구불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제법 반반한 등성이가 있다. 너른 재, 이렇게 불렸을 것이다.


원래는 소로였는데, 일제강점기 신작로가 됐다. 옛길의 풍경은 심취해 볼 만큼 그지없이 평안하다. 걸음, 걸음마다 호젓한 분위기가 묻어난다.


갈수록 앙상해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빛이 무척이나 그립다. ‘출렁이는 물결처럼/흩어진 햇살이 뛰어 다니듯/바람소리처럼/햇살이 산속으로 스며듭니다.’ 시비석이 위안을 준다.


겨울의 문턱에서 봄이 기다려진다. 그때는 연분홍 벚나무가 꽃을 흩뿌리고, 갖가지 야생화도 제 모습을 뽐내며 운치를 더할 것이다.

300년 느티나무 사이 화순 전경 장관

 

해발 240m 정상이다. 무등산이 저만치다. 안내 표지목은 장불재 7.4㎞, 만연산 4.8㎞, 수레바위 3.1㎞를 가리키고 있다. 광주와 화순을 정반대 방향으로 나타낸 표지목도 자리한다.


전망대 데크에는 300년 된 15m 느티나무 보호수 2그루가 서 있다. 역사의 산 증인이다. 올려다 보니 고개가 절로 꺾이고 만다. 화순읍 전경을 바라보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으나 뿌옇기만 하다.


비포장 길을 따라 화순으로 틀었다. 옛길 끝자리에 위치한 젊은 작가들의 복합문화 공간 ‘소아르(soar) 갤러리’에서 유턴이다. 다시 전망대, 이번엔 다행스럽게도 개였다. 야트막한 고개임에도 변화무쌍함을 실감케 한다.


안도하면서 셔터를 누르니, OK가 저절로 터져나온다. “좋았어….” 일출도 즐길 수 있다고 하는데, 다음으로 미뤘다.


너릿재는 지친 심신의 치유와 서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주변 경관을 살린 탐방로가 잘 조성돼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궂은 날씨에 중간중간 승용차가 힘에 부친 듯 오른다. 우산을 펴 들고 가는 가을을 붙잡는 사람이 있다. 그래도 눈길을 잡는 것은 혼자인 눈 속의 사람이다.

 

[ ‘너릿재’에 얽힌 역사의 비극 ]

 

광주민주화운동 한복판에서의 일이다. 1980년 5월22일 너릿재 위로 트럭 한 대가 올라온다. 터널을 막고 있던 계엄군의 총질이 가해지고, 영문도 모른 채 30여 명의 민간인들이 쓰러졌다. 총성과 유혈이 범벅이 됐다. 이후 트럭은 바리게이드로 사용됐다.


역사는 반복된다 했던가. 비극은 훨씬 이전부터였다. 6·25 당시에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 체포된 일부가 이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70여 일 뒤, 반동이란 이름으로 광주형무소에는 갇혔던 많은 사람들이 또 이곳을 넘었다. 하지만 죽음으로 가는 문이었다. 경찰 경비초소 주둔지로 너릿재 고지가 있었다고도 한다.


앞서 해방을 맞은 1946년에는 화순탄광의 광부들이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름길로 들어섰다가 쏟아진 총탄에 피를 흘렸다.


그 이전에는 화순과 장흥 등 전남 동부지역에서 잡힌 상당수의 동학농민군이나 협력자들이 학살당했고, 대한제국시절 능주 출신의 양회일이 이끄는 의병대도 화순 읍내를 점령하고 광주를 공략하기 위해 너릿재를 넘으려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가깝게는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6·25전쟁,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너릿재는 우리 역사의 정면을 관통하고 있다.


이념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치러야 하는 희생들이 다시는 없기를 소망한다.

 

<글·사진 광주매일신문 김종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