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더니

소란스러움은 노래가 되고, 북적거림은 그림이 되고

여행/공연장터의 삶, 장터의 맛 (3) 순천 아랫장
순천 아랫장은 야시장이 열리는 매주 금요일이나 토요일과 겹칠 때 완성이 되고 시간은 최고의 순간이 된다.

마치 큰 숲에 들어선 듯 했다. 숲에 들어서면 익숙하거나 또는 낯선 사물이 서로 뒤섞여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게만 느껴지게 마련이다.


순천 아랫장이 그랬다. 분명히 조금 전에 지나친 길 모롱이인데도 처음 본 듯하고, 처음 본 풍경인데도 아까 본 듯 했다. 장옥과 매대 등을 두 어 번 둘러보고서야 시장의 그림이 겨우 그려졌다.


“세상의 물건 중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더 많다”는 황영하 아랫장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단장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늦가을 햇살도 장보러 나온 시월 하순의 남녘 장은 풍성하고 따스했다. 시장은 사람과 물건으로 넘쳐났지만 스스로의 질서에 순응하며 움직였고,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부딪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노랗게 익은 단감이 산에서 내려오고, 하얀 은갈치가 바다에서 올라왔다. 새벽나절에 도축장을 거친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매대의 도마위에 눕고, 겨울이 오기 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비트 모종도 작은 화분의 국화꽃과 함께 햇살아래 가늘게 졸았다.


‘순천 웃장과 아랫장, 광양장과 남원장 등의 오일장을 찾아 다닌다’는 5인조 장돌뱅이 노점의 만두에서는 맨살의 대하가 푸드덕 거리고, 튀밥 튀는 뻥튀기 아저씨도 오늘은 뻥소리와 함께 신이 났다.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라는 대목에서 금세 목 메이게 하는 부부 각설이의 노래솜씨도 엿 사먹고 듣기에는 아까울 정도다.


아랫장에서는 소란스러움이 노래가 되고 북적거림이 그림이 됐다.

노점화원

◆장식품이 된 요강의 신분상승


장터는 올해 말 완공예정인 주차타워 공사가 한창으로 아직 주차시설이 별도로 마련돼 있지 않다. 주변 길가에 주차하고 장에 들어서는데 시장 초입, 골동품 노점의 한 자루 녹슨 권총이 뜬금없다. 달리기 시합의 출발 신호음을 내기 위한 권총이다. 권총은 달리기가 그리울 텐데 나는 반세기 전의 가을 운동회가 그립다.


노점의 골동품가게에는 인두며 놋쇠밥그릇, 곰방대, 연적, 워낭, 연적, 앞다지 좌물쇠 등이 젊은 날의 영화에 젖은 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골동품들의 잘 나가던 한 시절을 추억해주던 할아버지가 이곳저곳을 살피다 잘 닦인 놋쇠 요강 하나를 11만원 주고 샀다. “할아버지, 요강을 집에서 사용하시게요?” “아니어, 요기 뚜껑의 글씨가 좋아서 집에 장식용으로 둘라고 그래.”


요강의 뚜껑에는 건강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오래오래 살아 복을 누리길 기원하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의 한자 글귀가 원 테두리 안에 한 글자씩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집안의 장식품으로 품격이 올라간 요강의 영광은 지난날 수복강녕의 마음으로 오줌을 받던 수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데 생각이 미처 홀로 웃었다.


장평로를 따라 순천만정원 방향으로 길게 펼쳐진 장터 길가에 예쁜 이름의 감로찻집이 자리하고 있다. 국전 서예심사위원이기도 한 박경숙(62)씨가 운영하는 찻집으로 아랫장의 모든 정보와 얘깃거리가 오가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넓지 않지만, 좁지도 않은 시장의 찻집에서 산사의 차맛을 느끼며 저자거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도 꽤나 철학적이다.


◆여수엔 돌산갓, 순천엔 고들빼기


순천토박이 언론인인 서길원 형님으로부터 아랫장에 대한 귀동냥 위해 만나기로 사전에 약속했던 찻집이다. 찻집에는 순천시청 경제진흥과 이재성 과장이 자신의 담당 업무 가운데 하나라며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동석했다. 이 과장은 아랫장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열정으로 아랫장 번영회 박광수 회장과 이경원 부회장 등과 함께 나를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녔다.


시장은 매주 금.토요일 야시장이 열리는 먹거리 장터를 중심으로 A구역에서 H구역까지 8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식품전과 곡물, 어물, 회센터, 음식점, 방앗간, 장화 등 공산품코너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 가운데서도 곡물전의 순천 청결미와 어물전의 생선은 아랫장의 대표적 물산으로 유명하다. 순천만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청결미는 밥을 지으면 하얀 눈이 밥솥에 내려앉는다. 찰지고 윤기나는 눈밥은 입안에서 반찬 없이도 녹는다.


어물전에는 순천만과 여자만 등 남해안에서 잡히는 싱싱한 생선들이 가득하고 더러는 자반이나 건어물로 팔려나간다. 쌀뜨물에 넣어 삶거나 쪄낸 장대, 박대, 서대, 민어, 부서, 우럭 등의 자반과 건어물은 구이나 횟감과는 전혀 다른 제3의 경이로운 맛으로 식탁에 오른다.


또한 이웃집 여수에 돌산갓이 있다면 순천에는 고들빼기가 있다. 순천에서 생산되는 고들빼기는 씁쓰레한 깊은 맛과 아삭거리면서도 질기지 않는 식감으로 전국 최고를 자랑한다.


하지만 1만평의 면적에 매대 점포와 노점만도 1천개가 넘고 난전이 계속 늘어나다보니 품목들이 구역을 넘나들며 뒤섞여 있거나 중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랫장에서는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한 두 바퀴 시장 안팎을 둘러보는 것이 장보기의 지혜가 되는 이유다.


◆아랫장이 야시장을 만나는 날


아랫장이 이처럼 전국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으로 자리한 것은 순천의 지리적 여건에서 비롯됐다. 순천은 조계산과 봉화산 등의 깊은 산과 순천만 등 청정 바다를 끼고 있어 물산이 풍부한 탓도 있지만 일제시절 서울 부산 익산 영주 등과 함께 철도청이 들어설 만큼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로 물산의 집합체적 성격이 더 짙다.


여기에 아랫장이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으로 선정돼 3년째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을 펼치고 있는 지자체의 견인차 역할도 높이 살만하다.


“제조업보다는 생태환경의 정원 도시인 순천에서 아랫장은 지역경제의 마중물이 되고 있다.” 이 과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랫장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천사람들의 삶과 멋과 맛이 한데 어우러진 축제의 장이 되고 있다.


순천 아랫장이 열리는 2일과 7일이 야시장이 열리는 금요일이나 토요일과 겹치게 될 때 장은 완성이 되고 시간은 최고의 순간이 된다. 순천 아랫장이 야시장과 상호보완적 관계로 결합하여 등갈비 바베큐, 낚지 호롱, 곱창순대 야채볶음, 부채살 스테이크, 떡갈비 등 풍성한 먹거리가 시장을 채우면 ‘1만원의 행복’이 장터의 밤시간을 지배한다.


장보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또는 장에 들리기 전에 우리나라 국가정원 1호인 순천만국가정원을 비롯하여 순천만갈대밭을 둘러보는 것도 순천 아랫장이 주는 ‘이 또한 즐겁지 아니 한가’가 된다.


순천만국가정원에서 열리는 ‘정원갈대축제’는 지난 9월 29일부터 오는 11월 5일까지의 일정으로 열리고 있고, 순천만습지 일대에서 열리는 ‘순천만 갈대축제’는 오는 11월 3일부터 5일까지 사흘간의 일정으로 개최된다. 조영석/ 시민전문기자(kanjoys@hanmail.net)


◆ “아~ 맛나!”


-옛날 팥죽


원산지 표시가 칼 같은 국내산 팥만을 사용한다. 걸쭉한 팥물과 손으로 직접 뽑은 칼국수의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다. 주 고객은 40세 이상의 중년층이지만 소문을 듣고 요즘은 젊은이들도 많이 찾아온다. 양이 많아 곱빼기를 시키면 처치 곤란이다. 경력 18년의 이정미 사장은 자신의 손맛이 팥죽 맛의 비밀이라고 했다. 음식점 구역에 있다.


-엄마 명태전

야시장이 열리는 먹거리 장터에 위치하고 있다. 주된 메뉴인 명태전에서 가게이름을 따왔으나 굴전과 산적전, 새우전, 칠게 튀김, 인삼과 도라지 튀김 등도 인기 품목이다. 장이 서는 날은 하루 매출이 100만원에 달한다. 경력 10년의 오석순 할머니는 건너편에서 거드는 할아버지를 “울 신랑”이라 했다. 장날에는 ‘울 신랑’의 처제가 일손을 도울 만큼 바쁘다.


-완도 횟집


제철 생선 횟집으로 유명하다. 봄 도다리, 여름 하모, 가을 전어, 겨울 감성돔으로 사시사철 철따라 주 메뉴가 달라진다.


‘낮은 가격’과 ‘높은 품질’이라는 난이도 높은 과제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기본안주를 줄이고 싱싱한 활어를 직접 구매하는 것이 해답이다. 생선매운탕과 구이는 물론 오징어부추전도 안주 감으로 메뉴판에 붙여놓고 있다.


-복 방앗간


떡 찧지 않는 방앗간이다. 기름짜기와 미숫가루 등 분말제조로 특화한 방앗간이다. 한달 매출이 1000만원 가량. 자신이 직접 볶은 깨로 짠 들기름과 참기름을 판매하기도 하고 손님이 가져오는 참께와 들께를 볶아 기름을 짜주기도 한다. 참기름에 대한 불신이 많다보니 정직과 신뢰가 최우선이다. 김장철을 앞두고 수확한 고추를 빻으려는 사람과 기름을 짜려는 사람들로 요즘은 좁은 가게 안이 가득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