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더니

義와 藝, 광주의 사람들

여행/공연

사랑방·광주문화재단 공동기획
광주견문록 다시보기 ⑳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탐험대가 2011년부터 2015년까지 발품 팔아 찾아낸 광주의 공간·길·사람·역사현장의 매력을 공유하기 위해 20회에 걸쳐 연재한 ‘광주견문록 다시보기’의 마지막 순서다. 동학지도자 손화중부터 한말 의병장 김태원, 천재 요절가수 김정호, 가객 정용주까지, 광주의 의와 예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광주견문록 다시보기’를 끝맺는다. <편집자 주>

손화중
덕산에서 만난 동학지도자

광주천과 극락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덕흥마을 서남쪽에는 야트막한 덕산이 있다. 430년 된 느티나무와 시민 쉼터가 조성된 이 자리는 1894년 전남 지역을 총괄하던 동학지도자 손화중이 진을 치고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라고 한다.

정읍 출생인 손화중은 일찍 동학에 입도해 접주로 활동했고,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동학운동의 3대 지도자였다.

부드러운 인상과 뛰어난 설득력으로 전라도 내에서 가장 많은 교도를 거느린 대접주였던 손화중은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 속에서 검단대사 비결록을 꺼내서 어디론가 사라져 신비로운 인물로 여겨졌다.

 

이야기는 이렇다.

선운사 뒤 도솔암에 검당대사라는 중의 모습을 한 석불이 있고,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서울이 망한다는 비결이 석불의 배꼽에 들어 있었다.

손화중이 이 비결을 꺼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인데, 이 사건으로 손화중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잡혀갔으나 손화중만 잡히지 않았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전봉준의 설득으로 1차 봉기에 나선 손화중은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고, 1894년 4월 황토현 전투 승리에 이어 삼남지방을 승전을 휩쓸며 전주성에 입성했다.

접전을 벌였던 농민군과 관군 모두 타격이 컸는데, 조선정부가 청에 원군을 요청하자 전봉준은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하는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해산한다.

그러나 청의 개입을 빌미로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내정간섭에 이은 친일내각을 세우자 동학농민군은 반일을 기치로 2차 봉기에 나선다.

전봉준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할 때 손화중은 관군과 일본군이 나주 쪽에서 기습해올 것을 대비해 덕산에 진을 치고 나주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수차례 이어진 전투에서 농민군이 계속 패하면서 보급로까지 차단되자 북쪽으로 후퇴한 농민군은 12월1일 해산한다.

이후 부안에 숨어 있던 손화중은 관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1895년 3월30일 전봉준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의병장 김태원
죽봉로에서 한말 의병 찾기

國家安危在頃刻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意氣男兒何待亡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盡忠竭力義當事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志濟蒼生不爲名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한 것은 아니라네

兵死地含笑入地可也

전쟁은 죽은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의병장 김태원(1870~1908)이 아우 율에게 담긴 글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나주 문평 출신인 김태원은 함평과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회맹소에 합류하며 그 선봉에 섰다.

 


1907년 12월, 의병장 김태원은 나주, 함평, 장성, 무안 등지를 휩쓸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908년 1월1일, 담양 무동촌에서 ‘의병 잡는 귀신’으로 악명 높았던 요시다의 수비대를 격파했고, 2월24일에는 장성 토천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민중들은 의병장 김태원의 부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금품을 빼앗는 행위를 금지했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부하들을 이끌어 수십 차례의 항일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출귀몰하던 김태원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고, 잇따른 전투로 지병이 악화되었음에도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다 어등산에서 최후를 맞는다.

 


광주지하철 농성역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농성광장에서 의병장 김태원을 만났다. 진격하라는 명령과 함께 앞서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신출귀몰하며 일본군과 대적하던 모습이다.

현재의 동상은 1975년에 건립된 동상이 훼손돼 1998년 12월에 재건립한 것으로 의병장 김태원이 죽음을 맞은 어등산을 향하고 있다.

광주시는 의병장 김태원을 기리는 뜻에서 농성지하차도에서 동운고가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의병장 김태원의 호를 따서 죽봉로라 명명했다. 그러나 죽봉로라는 이름의 유래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김정호
영혼으로 노래한 비가(悲歌)의 왕자

독백하듯 사랑의 언어를 읊조리는 그의 모습에서 음악팬들은 모처럼 순수와 진실의 결정을 목격했다. 트로트에 젖어 젊은 포크음악에 정을 붙이는데 시간이 걸렸던 기성세대들도 김정호의 노래만은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의 목을 통하기만 하면 무조건 슬프고 처절한, 때로는 염세적 분위기로 표현되어 감읍하는 노래로 변하고 했다. 그는 가요계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찾기 어려운 비애의 왕자였다.

― 임진모 가수를 말하다 : 영혼으로 노래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 41 中

자신의 삶을 불사르듯 치열하게 음악에 매달리다 불멸의 음악을 남기고 떠난 이들이 있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놀라운 명곡을 내놓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천재 요절 가수라 부른다. 1970년대 우리의 심금을 미묘하게 흔들었던 천재 가수, 김정호도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초등학교 2학년까지 광주에서 생활했던 사실이 알려지며 광주시와 대한가수협회 광주지회는 김정호의 생가터에서 수창초교로 이어지는 길을 ‘하얀 나비의 가수 김정호 거리’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비가의 왕자로 불리는 김정호는 1970년 당시 음악계에서 ‘한국의 모차르트’라는 찬사를 받은 싱어송라이터로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처연한 선율에 유려한 코드 진행을 보여줬다.

김정호와 젊은 날을 함께 했던 동료 가수들은 달동네에서 배고픔과 싸워가며 음악 활동을 했던 그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얘기했다.

김정호가 음악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당시 음악적 동반자였던 임창제가 어니언스로 인기를 얻고, 자신의 앨범에 실린 곡들이 김정호가 작곡한 것이라 공개한 덕분이었다.

이후 임창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솔로가수로 데뷔한 김정호는 ‘이름 모를 소녀’를 통해 인기 가수가 되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며 김정호는 어떤 무대에도 설 수 없는 가수가 된 것이다.

2년 후, 김정호는 자신의 히트곡인 이름 모를 소녀의 주인공 이영희 씨와 결혼했으나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했을 만큼 생활이 어려웠다.

지인들이 그에게 맡긴 생음악 레스토랑 ‘꽃잎’이 당시 김정호가 유일하게 노래할 수 있는 무대였다.

 


1980년 가수 활동 금지에서 풀려난 김정호는 재기를 꿈꾸며 앨범 ‘인생’을 내놓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폐결핵이 그를 괴롭혔고, 담당의사는 노래를 계속하면 죽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한 곡을 노래하고 녹음하느라 무려 5개월이 걸렸음에도 그는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당시 김정호는 어디를 가든 꽹과리를 들고 다닐 정도로 국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명창 박동실을 외조부로 두었으나 모친의 극심한 반대로 국악을 배우지 못했던 김정호였기에 더욱 강한 끌림이 있었을 것이다.

숙명처럼 국악의 매력에 빠져든 김정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듯 마지막 앨범 ‘님’에 상여소리 같은 가락을 담아냈다. 그리고 1985년 11월29일 서울대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정호가 세상을 뜬지 30년 만인 2015년 10월10일, 김정호의 모교였던 광주수창초등학교에서 ‘제1회 김정호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1부에서는 김정호의 삶과 음악 세계를 담은 추모 영상 상영과 지역 가수들의 김정호 따라 부르기가 마련됐고, 2부에서는 김정호와 오랜 인연을 나눴던 하남석, 임창제, 신계행, 유심초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함께 김정호 추모 음악회는 잠시 대중의 기억 속에 사라졌던 가수 김정호를 되살리는 첫걸음이 되었다.

가객 정용주

어디서든 노래꽃 피우는 사람

악보 없이 500곡, 악보가 있다면 1000곡도 부를 수 있는 통기타 가수 정용주. 그에겐 가수라는 말보다 가객이 더 어울린다. 크고 작은 지역행사는 물론이고, 그의 노래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기타를 들고 달려가니 그야말로 가객인 것이다.

정용주는 박문옥, 한보리, 김원중, 고(故)범능스님과 함께 광주의 5대 포크가수로 손꼽힌다.

1970년대 청춘들이 그러했듯 기타 치며 노래하길 좋아했던 정용주는 광주MBC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에 고(故)김형옥과 듀엣으로 출연하며 본격적인 가수 인생을 시작한다. 그리고 삼십여 년을 광주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포크 가수로 살아왔다.


2002년에야 첫 음반 ‘좁은 길 그 위에서’를 내놓은 정용주는, 4년 후 산노래를 담은 2집 음반 ‘산·산·산’을 발표했다.

최초의 산노래 앨범을 제작한 이유를 물으니 산에서 불리는 산노래 중에 일본 군가를 개사한 노래가 많아 우리 산노래를 전파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음반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마음이 산을 좋아하는 이들과 통했던 것일까? 산노래 ‘지리산’이 입소문을 타면서 정용주는 ‘지리산 가객 정용주’란 닉네임까지 얻었다.

2006년 가객 정용주는 ‘찾아가는 음악여행’을 시작한다. 노래하는 이들이 한 달에 한번이라도 모여 공연도 하고, 봉사 활동도 하자는 취지였다. ‘제1회 찾아가는 음악여행’은 해남 설아다원에서 열렸다.

도심이 아닌 자연에서의 공연은 공연자와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행복한 경험이었고, 이후 정용주의 찾아가는 음악여행은 관객이 몇 명 되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도 진행됐다.

찾아가는 음악여행에 동참한 문화예술인들 대부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공연으로 누군가에게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용주의 찾아가는 음악여행에는 원칙이 하나 있다. 공연 요청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지만, 공연 요청 없이 공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연을 이어가는 것보다 진정 음악을 나누고 싶은 이들과 함께 공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삼십여 년을 꿋꿋이 기타 하나 들고 음악 활동을 이어온 가객의 뚝심이다.

 

정용주에게 언제까지 가수 활동을 할 계획인지 물으니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겠다고 한다. 무대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노래꽃을 피워온 30년 내공의 가객다운 답변이다.

최근 퓨전 국악 작업에 빠져있다는 그는 우리 민족의 음악인 국악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작업해 누구나 쉽게 즐기게 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오늘도 기타 하나 둘러매고 어딘가로 나서는 가객 정용주, 그가 열정을 다해 선사하는 노래꽃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이 기사와 사진은 광주문화재단이 발간한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Ⅴ’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