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야기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더라면.....

anapul*** 2019-12-02 15:20 1,06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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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윤봉길과 안중근을 존경한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정주영과 이병철 구인회는 1936년도에 각각 서울 대구에서 상회

를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1910년도 생이었던 이병철 1915년 생이었던 정주영 1907년생이

었던 구인회에게 사업을 시작했던 1936년은 한참 피가 끓는 20대

후반이었던 셈이다.


그들이 그 시절에 장사를 시작한 것은 1937년에 일본의 만주침략

이 되면서 전쟁특수로 조선의 경제가 호황기에 접어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쌀같은 경우 군대에도 납품하고, 시중에도 팔아야 하기에 가격이

올랐고, 술을 포함한 군대에 납품한 여러물건들의 수요가 있었다.


만약에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가 사업을 시작안하고, 안중근처럼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모르긴 몰라도 오늘 한국이 1인당 소득히 3만달러에 이르지 못했

을 것이며, 많은 이땅의 아들들이 중산층으로 살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농촌출신의 많은 젊은이들이 삼성이나 현대 엘지에 들어가서 성

실히 일해서 중산층이 될수 있었다.  제조업은 못배운 사람들이

중산층이 될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좀 극단적으로 전망하면. 그들이 없었다면 잘해봐야 베트남이나

필리핀 정도 살지 않고 있을까.


이병철이가 노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73세에 반도체를 투

자를 결정했던 이병철, 조선소도 없는 울산의 황량한 지도를 들고

배들 만들어 주겠다고 전 세계 선주를 찾아다녔던 정주영 농촌중

심의 국가에 전자제품을 만들었던 구인회.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것고 누리고 있고 얻고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서 일본은 지금도 우리를

무시하고 백안시 하고 있을것이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안하고, 돈을 벌기위해 사업을 했다고 손

가락질 받을수도 있었겠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 경쟁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선악이분법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필요하면 유니클로 가서 옷도 사는것도 괜찮다고 본다.


무슨 일에 있어서든 도덕적인 기준을 우선시하고 선악 이분법으

로 접근한다면 단순하고 명쾌해서 좋지만, 그 만큼 우리는   많은

것을  잃을수도 있고. 여러 가능성을 스스로 문을 닫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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