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경양방죽은 광주시민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입력 2018.07.11. 18:48 수정 2018.07.11. 19:11 댓글 0개

최근 경양방죽의 복원에 관한 이야기가 제기된 가운데 경양방죽의 역사적 연원과 의미를 문헌과 고증을 거쳐 타맥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무등공부방은 10일 변동명 교수(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를 초청, ‘광주경양방죽의 수축과 운영’을 주제로 1966년 매립돼 역사속으로 사라진 경양방죽(계림동 구 광주시청 자리)과 인근 태봉산의 역사를 재조명했다.

이날 강단에 선 변 교수는 호남 최대 면적을 자랑하던 인공호수 경양방죽이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진 배경과 과정, 축조 연원 등을 탐구해나갔다.

일제가 1940년대 3분의 2 가량을 메워버린 경양방죽은 해방후 광주시가 어려운 재정난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을 메우고 토지로 활용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시의 팽창 및 주거지 개발 등으로 무등산 자락과 인근 태봉산을 헐어다 매워버린 경양방죽은 이제 광주의 오랜 토박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추억의 지명이 됐다.

경양방죽은 옛 호남에서 손꼽히는 저수지였다고 밝히며 강의를 시작한 변 교수는 방죽이 오래도록 옛 시문 등에서 소재로 쓰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렸다.

하지만 이토록 관심이 컸던데 비해 방죽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사실은 드물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정도가 더 심해지는데, 이를테면 방죽이 누구에 의해 언제 수축됐는지도 불분명해 추측으로만 가늠할 정도다.

변 교수는 “방죽의 관리와 운영의 문제는 거의 언급조차 된 적이 없다”며 “정밀한 논의를 거쳐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우선시돼야한다”고 입장을 말했다.

이어 변 교수는 그간의 연구를 통해 접근한 경양방죽의 수축 시기와 수축 주체등을 밝혀 나갔다.

경양방죽의 수축 시기는 지역사회에서 막연히 이야기가 오가는 고대 수축설과 나름의 논거를 제시하며 주장되는 조선시대설이 양립하고 있다. 고대 저수지 중의 하나 혹은 후백제왕 견훤의 어머니가 흉년을 극복하고자 지은 관개시설 설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선 마땅한 근거가 없어 진위를 따질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시기라 밝히는 견해에 대해 살핀 그는 세종대와 임진왜란 이후 당시 축조설을 예로 드렀다.

1420~1440년대의 경양방죽과 관련된 인물로 ‘김방’이 언급되며 그와 관련된 가장 오랜 기록은 1913년 작성된 일제강점기 중추원 조사자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지역사회서 구전되던 내용을 옮겨적은 듯 보이는 이 자료를 통해 지역민들은 김방이 처음 경양방죽을 수축했다 주장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가 세종대에 처음 축조했음을 확인시켜주는 믿을만한 근거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최근들어 경양방죽이 1620년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나타났다.

변 교수는 “양경우(1568~?)의 시 ‘경양방죽’과 시에 등장한 광주목사 조희일을 통해 조희일의 부임 당시인 1620년대에 경양방죽이 실존했다는 근거를 들 수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경양방죽이 1620년대 즈음 존재를 확인한데 지나지 않았다며 수축 시기는 이보다 앞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수축 주체로는 관 주도를 주장했다. 조선시대 국유 내지는 공유의 수리시설로 파악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일제시기 중추원 조사자료와 가까운 시기에 작성된 지적원도(1915)에서는 국가 소유의 땅으로 명시하고 있다.

변 교수는 “과거 천수답이 농사의 기본이던 조선시대에네는 수리시설이 중요한 재산이자 권력이었다”며 “관에서 지역 유지들의 세력 견제를 위해 방죽을 수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강의는 무등공부방 회원들의 저마다 방죽의 현 위치와 어린시절 방죽에 관한 추억담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방죽을 둘러싼 의미와 복원 타당성을 활발히 논의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이영주 인턴기자 dalk14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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