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고조선·낙랑·왜와 교류하며 고유 문화전통 확립

입력 2018.02.13. 08:40 댓글 0개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14>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한 마한 남부 연맹과 백제 上
구례 용두리 출토 가야계 토기

최근 발굴 조사된 구례군 '구례 용두리 고분' 유적에서 가야계 토광묘(목곽묘, 목관묘) 3기와 가야계 토기, 청동기 시대 집자리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본보 2018년 2월 1일자 2면)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목 짧은 단지, 목 긴 항아리, 굽다리 접시, 그릇 받침 등 대부분 가야계 토기들인데, 가야의 어느 특정한 시기와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아라가야계, 소가야계, 대가야계 등 다양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구례 용두 마을 강변은 섬진강을 드나들던 배를 매던 '배틀재'라는 지명과 선착장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이 섬진강을 통해 내륙과 가야 지역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유물들이 백제와 가야의 교류를 살피는 귀중한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수긍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마한 동부 지역의 경우 마한계 주거 양식인 4주식 형태와 영산강 유역의 집 자리인 방형이 나타나는 등 마한계 특질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 백제의 세력권으로 파악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번 구례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 지역의 마한 연맹체가 가야를 비롯하여 백제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 증거라고 살핌이 타당하다고 본다. 결국 마한 연맹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한 좋은 사례라 하겠다.

필자는 이제껏 마한 남부 연맹의 정치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독자적인 연맹체를 결성한 영산강 유역 연맹체들은 재지적인 토착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 낙랑, 왜와 교류를 하며 새로운 고유문화 전통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영산 지중해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신창동 지역에서 보이는 왜계 및 낙랑계 유물들은 영산 지중해 일대가 대외 교역의 중심지였다고 하는 것을 새삼 확인해주었다. 즉, 이 지역의 연맹체는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일찍부터 고조선과 낙랑을 통한 선진 중국 문물을 수입하고 왜와도 교류를 하며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미 일본 열도에 '영산강식 토기'라고 명명된 이 지역의 특유의 토기를 통해 이미 영산강 유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음을 확인한 바 있지만, 재지적인 색채가 분명한 신창동식 옹관과 꾸러미 채 발견되는 오수전 화폐 또한 독자적인 정치체의 존재를 명맥히 해준다. 광주 월계동 지역에 있는 전방후원형 고분과 같은 거대한 봉분을 조영한 세력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 정치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예컨대, 영산강식 토기 및 옹관묘와 같은 재지적 요소가 많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인 특징일 뿐 정치적 독립성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산강 유역에 유난히 집중 분포되어 있는 옹관묘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6세기에 들어 백제식 석실묘로 대체되고 있는 데서 묘제의 변화와 정치 세력 변동이 깊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옹관묘, 영산강식 토기, 신창동식 옹관, 삼각점토대 토기 등 이 지역의 토착성을 반영하고 있는 수많은 유물들은 독자적인 정치체가 이곳에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또한 광개토왕릉비문 등 여타의 기록에 4세기 중반 이후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국'의 명칭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근초고왕의 친정으로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문은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나라의 경우만 기록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말하자면 마한 남부 연맹국가들은 당시 고구려와 이해관계가 없어 비문에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따라서 광개토왕릉비문에 국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마한 남부 연맹 국가들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앞서 영산강 유역 정치체들이 이미 기원전 3∼4세기부터 고조선과 낙랑 등과 직접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도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살핀 바 있다. 그런데 신창동 지역을 비롯하여 영산강 유역에서 철제 농기구 등이 많이 출토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회 분화가 촉진되지 않아 정치적 발전이 늦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지어 백제의 지배가 본격화된 5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며 사회 분화가 촉진되었고, 신흥 부농층의 성장으로 기득권의 위협을 느낀 재지 세력들이 백제 중앙권력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신창동 출토 토기

그러나 영산강 유역은 충적토로 이루어진 황토지대이기 때문에 굳이 철제 농기구가 필요하지 않아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늦었을 따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말하자면 목재 농기구를 가지고도 철제 농기구 이상의 생산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무려 두께 155cm에 달하는 신창동 유적의 벼 압착층의 존재를 통해 헤아릴 수 있다. 이를테면 이 지역에서는 목재 낫을 비롯하여 수많은 목재 농기구가 출토되고 있어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 해 준다. 따라서 생산력을 독점한 지배 세력의 권력 기반은 점차 강대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말하자면 월계동 대형 전방후원형 고분, 신촌리 9호분 등 대형 고분은 이들 권력자의 존재를 입증해준다. 곧, 철제 농기구가 사회 분화를 촉진하여 기득권의 위협을 느낀 세력이 백제 중앙 권력과 결탁했다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이 지역 출토 유물들에서 낙랑계 및 왜계 요소 그리고 재지적 요소들이 함께 보이는 것은 재지적인 토착성을 바탕으로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를 용해시켜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 지역 마한 연맹체들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영산강 유역 연맹체들이 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백제와의 관계에서 확인된다.

일본서기 신공기 46년(366) 3월조에 "왜가 사마숙이를 탁순국에 파견하였는데, 탁순국왕이 말하기를 '갑자년 7월 중에 백제인 구씨 등 3인이 와서 동방에 귀국 일본이 있다고 들었는데 통하게 해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백제가 탁순국을 매개로 왜와 통교하였다는 것이다. 탁순국은 현재 경남 창원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근초고왕 21년(366)의 일이다. 말하자면 이때 비로소 백제와 왜가 직접적인 교류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백제는 어떻게 왜와 통교하였을까 궁금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에는 낙랑에서 왜로 가려면 한반도 서남해안을 경유하여 가야 및 대마도를 거치는 해로를 이용한다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백제가 왜와 통교하려면 이 루트를 이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창원 지역의 탁순국을 통해 왜와 통교를 시도했다면 이 까닭은 무엇일까? 학계에서는 당시 백제가 섬진강 줄기를 타고 서부 경남 지역 연맹체와 연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왜 잘 알려져 있는 해상 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경로를 찾으려 했을까?

이는 그동안 한반도 서남부를 장악하고 있는 침미다례나 내비리국 등 마한 남부 연맹을 통해 간접적인 교류를 하였던 백제가 근초고왕 때 와서 왜와 직접적인 교류를 시도하고 있는 모습을 알려준다. 그러나 4세기 중엽 백제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마한 남부 연맹은 백제와 왜의 직접 교류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백제는 서남해안 해상 루트를 포기하고 내륙 소백산맥 줄기를 넘어 섬진강을 통해 서부 경남 지역으로 우회하는 루트를 찾았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에서 당시 침미다례 등 영산강 유역의 정치체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고하였는지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추론은 불과 3년 후 근초고왕이 왜와 탁순국의 도움을 받아 침미다례를 정면이 아닌 배후에서 공격하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백제 근초고왕 군대는 10여 년 후 고구려와 싸울 때 동원된 병사가 3만에 이를 정도로 막강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침미다례 중심의 연맹체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당시 백제가 침미다례를 '도륙' 내었다는 하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엄청난 공격을 하였지만 이후에도 이 지역에 재지 토착적인 문화 요소들이 그대로 보이고 있고, 백제의 대외 무역루트가 여전히 섬진강 줄기를 통해 서부 경남 해안이었다는 점은 마한 남부 연맹 세력이 백제의 침공 앞에 붕괴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는 이 지역이 갖고 있는 강고한 정체성이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영산강 유역이 백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주장은 더 이상 입론의 근거가 없다. 문학박사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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