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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기울어진 신체극의 괴상·야릇한 불안 묘미...연극 '그믐'

입력 2019.10.20. 15:36 댓글 0개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사진 = 남산예술센터·이강물 제공)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기억의 역사는 부정합이다. 시간의 순서대로만 납작하게 누워 있지 않다. 과거의 기억, 상처가 돌연 파고 들어오면 현재도 속절없이 무너지게한다.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이 바탕인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각색 정진새·연출 강량원)과 맞닿는 지점이다.

동급생 '영훈'을 살인한 죄로 교도소에 들어간 남자가 주인공. 그는 '우주 알 이야기'라는 소설을 써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던 '여자'가 일하는 출판사에 보낸다.

여자는 소설이 자신의 이야기인 것을 감지하고 남자를 찾아간다. 남자의 궤적을 좇으며 그의 일상을 방해하는 영훈의 어머니는 재회한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을 순서대로 거칠게 요약했다. 그런데 소설은 페이지를 마구 뒤섞어 놓은 것처럼 내용이 전개된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여 있다. 시간 배열의 상식을 깨트린다. 공간 구분도 무의미하다.

연극은 이 소설적 화법을 무대 위로 정확하게 번역해낸다. 과거의 남자와 지금의 남자가 수시로 번갈아가며 등장하고, 과거의 사건은 끊임없이 변주돼 무대 위에서 재생산된다.

덕분에 관객의 두뇌와 가슴도 바빠진다. 불친절한 극의 설명 방식으로 인해 생긴 여백을 고민한다. 인과 관계와 혼란이 따른다. 여기서 이 연극의 장점이 폭발한다. 커다란 줄기만 파악하면, 무궁무진한 관람법이 생긴다. 페이지를 순서대로 묶어 놓은 책을 저만의 방식으로 다시 분철하게 된다. '당신이 연극을 기억하는 방식'을 고민하게 만든다.

신체극은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이다. 달처럼 둥근 형상의 원형 무대는 객석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배우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지 않으면, 미끄러질 정도의 각도다.

대사를 내뱉는 배우들의 신체 역시 기울어져 있다. 똑바로 서서 정확히 말을 내뱉는 인물이 없다. 말을 할 때마다 한 자리에서 뱅뱅 돈다. 세상과 지구 그리고 우주가 도는 것처럼. 인물들은 삶에서 유영하는 듯하다. 고뇌, 시련의 중력을 어떻게든 버티고 사는 이들처럼 보인다.

비현실적인 내용과 무대, 구불구불 이어지는 듯한 배우들의 화법과 신체 동작으로 인해 공연 내내 불길함과 불안함이 엄습한다. 그리고 예정됐던 비극이 찾아온다.

영훈의 어머니는 영훈을 죽인 남자를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명명했지만, 남자를 결국 삶의 끝으로 몰아세운다. 남자는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죄의식에서 해방될까. 평생 상처를 안고 산 영훈의 어머니는 이제 죄의식까지 안은 걸까. 이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연극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괴상하고 야릇한 악몽 또는 위로를 안긴다.

기억했던 부분이 다시 기억되고, 기억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새로 기억된다. 극단 동과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가 합작으로 지난해 초연, 권위 있는 상을 휩쓸었다. 27일까지 재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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