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중국어 문맹' 언어학자의 고군분투기

입력 2019.08.21. 20:58 수정 2019.08.21. 20:58 댓글 0개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백승주 지음/은행나무/1만4천원

오락은 있지만 성찰은 없는 외국인 탐닉 시대. 이방인의 눈으로 익숙한 것을 뒤집어보는 것에 그 어느 때보다 열광하는 시대.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는 외국인 전성시대에 순도 100퍼센트 외국인이 된다는 것, 다른 호흡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유려하고 재치 있는 문체로 역설한 책이다.

언어학자 전남대 백승주 교수가 '문맹'의 눈으로 중국 상하이의 일상과 사람, 다름과 같음, 진진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다뤘다.

언어학자인 만큼 책에는 언어-사회-사람의 고리를 잇는 신선하고도 유쾌한 시선이 곳곳에 드러난다.

'버스가 가진 수많은 풍경들'에서 저자는 타야 할 버스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리는 긴박한 사건으로부터 '버스'라는 단어의 기원 '옴니버스'를 도출해낸다.

또 끼니로 때울 달걀을 삶으면서 인간의 입에 대한 명상으로 확대되는 '인간의 입이란 보잘것없습니다'에서는 먹는 행위에 말이 어떻게 개입되는지를 티라노사우루스와 마녀, 셰프, 사냥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와 줄줄이 엮어 고찰한다.

저자가 책 전면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어떤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라는 큰 풍경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정체성과 한 사회의 정체성은 언어를 비롯한 여러 상징으로 연결되고 조직되며, '문화'라는 것도 기실 다양한 디폴트 값들의 묶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저자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절묘한 비유와 지적인 유머로 참신하고 진진하게 풀어낸다.

'슈퍼 리치의 악몽'에서 명나라 세도가 반윤단이 만든 아름다운 건축물 '구곡교'를 반윤단의 악몽과 연결시켜 강시와 좀비로 마감하는 저자의 능청스러운 글재주는 새삼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또 라오창팡이라는 상하이 최대 도살장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로마신화 '크레타의 미궁'을 떠올리고 과거와 현재, 중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근현대사를 뭉근하게 녹여낸 '미로와 미궁의 세계사'는 저자만의 독창적인 사유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책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소리로 지은 박물관'에서는 '쉬거우'라는 가상의 예술가를 창조해 세계 유수 박물관의 본질과 예술, 지금은 자취를 감춘 소리들을 찾는다.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온갖 장식품으로 둥지 진입로를 꾸미고 둥지가 커보이게끔 착시현상까지 일으키는 바우어새를 국가와 박물관에 빗댄 부분도 새롭다. 여행과 외국인 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요즘, 세계 유수의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한 경험이 아닌 시대에 박물관의 기능과 예술의 의미를 반문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더없이 귀중하다.

언어를 매개로 타인과 세상에 연결되던 한 사람이 언어를 잃고 난 뒤, 자기 자신과 뿌리, 사람과 사회, 일상과 공간, 삶의 의미로 사유를 확장하는 책은 총 16편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단순한 해외 체류기라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사유를 녹여낸 아주 진진한 인문 에세이에 가깝다. 익숙한 디폴트 값을 뒤집는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일상의 진부함을 타파하는 한층 더 넓고 깊은 시각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김옥경기자 okkim@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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