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무주·완산주 지역서 신라 부정 새 왕국 건설 움직임

입력 2019.08.12. 13:56 수정 2019.08.12. 14:20 댓글 0개
박해현의 마한사
7. 마한 정체성, 김헌창 난으로 표출되다 (上)

최근 들어 김헌창이 국호와 연호를 새롭게 사용하는 등 신라와는 다른 정치 체제를 지향하였고, 이 사건 이후 지방세력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며 중앙집권을 지향하는 신라의 정치는 붕괴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옛 마한 지역에 속하였던 무주, 완산주 지역에서 김헌창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까닭은 마한왕국 시기에 이 지역에서 강고하게 형성된 정체성이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번 휴가는 경주에서 보냈다. 국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마한 특별법과 관련하여 가야, 신라의 역사를 간직한 곳의 사정과 유적지 보존 실태를 파악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김해의 여당 국회의원이 마한을 제외한 신라·고구려·백제·가야사 연구 특별법안을 제출하였다. 경남도의회 차원에서는 '가야사 연구 복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대정부 건의안'을 7월 19일 채택하여 국회의 입법 활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경주 지역에서는 이 지역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130명 넘는 국회의원이 서명한 '신라 왕경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마한, 가야, 신라 등 고대국가가 형성된 중심지에서 각각 특별법을 동시에 제정한다면 '특별법 홍수' 사태가 초래되어 '쭉정이' 특별법이 될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 추진하는 '마한 특별법'은 그동안 망각의 기억에 있는 한국 고대사의 원형을 찾아 역사적 진실을 찾는 기초 작업임과 동시에 지역 균형 발전 차원에서 추진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다른 특별법과는 성격이 다름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 답사는 역사자원의 관광 자원화가 경제 발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 '경주' 하면 '불국사'·'석굴암'이었다면, 최근에는 '안압지의 야간 경관'을 말한다. 안압지는 신라 왕궁인 월성 바로 앞에 있는 인공연못이고, 임해전은 안압지 안에 있는 누각으로 통일신라 귀족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말 논밭으로 변해 있는 안압지 터를 발굴하였더니 당시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안압지 유적을 기록과 발굴조사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인공연못·기화요초·임해전 등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복원하였다. 조명시설까지 화려하게 하였다. 낮에도 연못에 비치는 소나무와 건물들의 아름다움이, 밤에 더욱 화려한 자태를 뽐내 마치 신선 세계에 온 듯하였다. 안압지 야경을 보기 위해 평일 밤 8시 30분 무렵이었는데도 넓은 주차장은 '만차'였고, 200m 떨어진 황룡사 주차장에서 안압지를 향해 걸어가는 인파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안압지에 들어가기 위해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입구는 인산인해였다. 4곳에서 발권하였지만 족히 30분은 걸렸다. 수만 명은 모인 듯하였다. 역사자원이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필자는 영암 시종·나주 반남 지역에 경주 대릉원보다 많은 마한 시기의 대형고분들을 생각하였다. 그곳 고분에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번 시종 쌍고분에서 금동관편이 출토되고, 나주 세지 송제리 고분에서 당시 사회를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나오는 등 우리 지역도 땅을 파기만 하면 마한의 유물들이 나오고 있다. 하루바삐 발굴·조사·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꽃피웠던 '마한 르네상스'의 화려한 모습이 복원되길 고대한다.

필자는 늘 '전라도 정신'의 실체를 찾으려 한다. 그 원형은 무엇이며 언제 형성되기 시작하였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마한'을 주목하였다. '마한' 문화는 고유의 토착성을 기반으로 다양한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창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이 지역의 정치체들은 기원전 4, 5세기 무렵부터 적어도 6세기 중엽까지 거의 1천년 넘게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전라도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믿어진다.

왕인박사의 후예인 '行基'스님이 왕인이 도일한 지 수세기가 흘렀음에도 '백제계' 아니 '마한계'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나,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법상종을 개창한 유명한 진표율사가 백제가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백제인이다'라고 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데서 이 지역에 흐르는 정체성의 실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강왕 설화가 전해지는 익산과 그리 멀지 않은 김제 지역도 오랫동안 마한의 영역이었다. 진표 스님이 말한 '백제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한인'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틀림이 없겠다.

마한인들이 지녔던 정체성은 정치적으로 이 지역이 억압받았을 때 강한 저항의식으로 표출되었다. 마한 지역과 대등한 수준의 통합을 이룬 백제가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어 부여계의 정통을 강조하려 하자 마한인들이 반발하여 '남부여' 사용을 포기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무왕의 익산 천도론까지 나왔다. 마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귀족세력을 억누르려는 의자왕의 왕권강화책은 내부 갈등을 유발하여 멸망을 재촉하였다. 백제 부흥 운동이 전개될 때 마한의 옛 근거지인 영산강 유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포용 융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경주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는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마한 지역에 형성된 강고한 정체성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진표가 '백제인이다'라고 하여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난 왕조 출신임을 강조한 것이라든가, 신라계와 무관한 이 지역 고유의 토착적 전통 양식이 배어있는 석탑이 조영되고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옛 마한·백제계가 지닌 정치적 상실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이 심화 되면서 이 지역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해상세력을 건설한 원동력이나 마한·백제의 부흥을 외치며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견훤의 사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장보고 등장 이전에 무주(전남), 완산주(전북) 등 옛 마한 지역에서 신라 정부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이 그것이다. 이 난에 대해 1990년대 중반까지는 김주원계와 김경신계, 곧 무열왕계와 내물왕계 사이에 벌어진 왕위쟁탈전의 연장, 또는 무열왕계의 왕위부흥 운동으로 보았다.

최근 들어 김헌창이 국호와 연호를 새롭게 사용하는 등 신라와는 다른 정치 체제를 지향하였고, 이 사건 이후 지방세력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며 중앙집권을 지향하는 신라의 정치는 붕괴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옛 마한 지역에 속하였던 무주, 완산주 지역에서 김헌창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까닭은 마한왕국 시기에 이 지역에서 강고하게 형성된 정체성이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 김헌창

김헌창은 통일신라의 시중, 청주(지금의 진주)·무진주(지금의 광주) 도독·웅주(지금의 공주) 도독을 역임하였다. 그의 父는 김주원. 무열왕 후손으로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으나 내물왕 후손인 김경신과의 왕위 계승 싸움에서 패하고 명주(지금의 강릉)로 물러나 있었다. 애장왕 때 김주원계를 포용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김헌창에게 시중 직을 제수하였으나 무진주, 청주, 웅천주 도독 등 외직으로 전전하면서 불만이 쌓였다. 웅천주 도독으로 있던 822년 반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그러나 반란은 한 달 만에 실패로 끝났다. 신라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김헌창 난은 신라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문제를 정리하여 보려는 까닭이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 헌덕왕 14년(822) 3월에 발발하였다. 난의 진행 과정과 경과는, '삼국사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논리 전개상 필요한 부분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①3월에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아버지인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長安이라 하고, 경운 원년이라 건원하였다. ②무진·완산·청·사벌 4주 도독과 국원·서원·금관사신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의 소속으로 삼았다. 청주도독 향영은 퇴화군으로 탈주하였고, 한산·우두·삽량·패강·북원 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아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 완산長史 최웅, 州助인 아찬 정연의 아들 영충 등은 왕경으로 도망하여 이를 알렸다. 왕은 즉시 최웅에게 급찬과 함께 속함군태수를 제수하고 영충에게는 급찬을 제수하였다.(하략)

웅천주(공주) 도독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이유와 무진주(광주)와 완산주(전주) 청주(강주, 진주) 사벌주(상주)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가담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이유를 그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시중이었던 김주원은 선덕왕 후사를 둘러싸고 원성왕이 된 김경신과 무력 충돌 끝에 패퇴하여 강원도 명주(강릉)에서 은거하였다. 김주원과 김경신의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싸움에 대해 '삼국유사'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김헌창이 그의 父인 김주원이 왕위 계승 싸움에서 승리하였다면 응당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가 그의 父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반발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김헌창이 도독으로 있는 웅천주를 비롯하여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 등 9개 주 가운데 무려 다섯 주, 그리고 5소경 가운데 국원, 서원, 금관소경 등 세 소경이 가담하는 등 거의 모든 지방들이 반란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이들 지역이 김헌창의 난에 가담하였던 까닭을 김헌창의 위협 때문이라고 삼국사기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들 지역이 동시에 김헌창의 거병에 뜻을 같이하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문학박사·초당대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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