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청

연둔리 숲정이와 김삿갓 종명지

입력 2019.07.16. 14:16 댓글 0개

● 화순 제 7경, 연둔리 숲정이

파란 하늘~~ 하얀 구름이 좋은 날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화순의 하늘 아래 어디로 보나 누구라도 쉬어 가고 싶은 연둔리 숲정이가 그곳입니다.

연동 마을의 '연'자와 둔동 마을의 '둔'자가 연둔리 마을이 되었고, 여름철 하늘만 쳐다보며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까? 

조바심 내는 농심은 연둔교를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도 다녔을 듯합니다.

오늘만 살다 가도 좋을 산수화가 지금 내 눈앞에 있습니다. 둔동에 빠진 구름 타고 저 멀리 백아산 하늘 다리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연화봉 아래 연꽃처럼 생겨서 연동이라 불리기도 하고, 동복 물이 숲정이로 모인다고 해서 둔동이라 불리니 어떻게 불러도 연둔리 숲정이는 하나입니다.

하늘 아래 숲이 있고 내가 흐르면 제대로 숨이 쉬어집니다. '청산이 멀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요.

연둔리 숲정이는 화순 7경!!! 마을 근처 숲, 숲정이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 237호로 마을의 지혜가 모여 조림한 숲정이 길은 정겨운 외갓집 가는 길입니다.

< 화순 8경 >

오늘의 핫플레이스를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하늘빛 드리운 동복천이 '계탄 날'인 듯합니다.

​한적하게 보이는 연둔교는 그리움이 많았던지 여기 어디쯤에서 아련하고 애틋한 그리움이 물빛 되어 저 다리를 건넙니다.

지금은 엄두도 안 나겠지만 어린 시절 물만 보며 뛰어들어 미역 감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무슨 상념이 들끓는지 연신 흐르는 강물만 보며 세월 보냅니다. 숲정이에서 '멍 때리기'로 힐링되는 시간이 좋고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겠네요.

마을 골골 정이 쌓여서 인심도 좋아 보였는데 넉살 좋은 저를 피하는지? 어르신들이 낮잠이라도 주무시는지 마을에는 인적이 드물어 객만 요란을 피웁니다.

아! 말벌이다~~ 사람도 함부로 못하는 나무를 말벌이 둥지를 틀었는지 기자가 한 발짝 다가서니 경계령이 떨어진 듯 더듬이를 치켜세웁니다.

​그래도 기자는 유유자적- 숲정이 따라 정을 쌓아보렵니다. 뒷짐 지고 느긋하게 걸으면 20분 정도 걸립니다. 사진 담아내는 것은 잠시 멈추고 숲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 봅니다.

예부터 홍수라도 올라 치면 700m에 걸쳐 남북방향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제일 어른이신 왕버들나무가 나서고 그 아래 층층 시야 500살 된 느티나무, 서어나무, 검팽나무, 상수리나무, 뽕나무 등 230여 그루의 뿌리 깊은 나무들이 서로 앞을 다퉈 수호신이 되어 주었습니다. 

설령 고사한 나무가 있더라도 마음대로 베어낼 수 없는 엄격한 규약이 있다니 오늘의 숲은 내일까지, 후손들은 최근까지 나무를 심어 지혜의 숲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동북천 수중보가 손에 닿을 듯 왕버들 씨앗이 날아들어 노거수 왕버들나무는 물이 그리운 건지 마음이 천리를 가도 몸은 못 따라갑니다.

사람이나 나무나 가는 마음 잡을 수가 있나요? 찬란한 청명함이 돋보이는 강물이 좋아 이제 강 건넛마을로 떠납니다.

연둔리 동복천 따라 물 따라 산 따라 가인 김삿갓을 만나러 가볼 시간입니다. 맘만 먹으면 연둔리 숲정이에서 금방이니(1.5km) 거칠 것 없이 떠나봅니다.

● 김삿갓 종명지와 문학동산, 초분

난고 김병연이 삿갓 하나로 세상을 평정하던 그때 그 시절로 들어가 보실까요?

김삿갓의 삶을 동경하는 이 세대의 가인들이 많았던지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삶이 되었나 봅니다.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안에 모두 귀한 분들이네 생도는 열 명도 못 되고 선생은 내다보지도 않네 세상 인심 야박한지라 안다는 사람이 더 무섭다니 '웃픈' 시가 씁쓸하네요.

오라 한 데는 없지만 정처 없이 발길 재촉하며 연명하는 난고의 고단함이 세상 달관한 듯 삿갓 속 그의 눈빛은 더 깊어집니다.

가인 김삿갓은 우리나라 어디든 들고난 자리 없이 정처 없이 떠도는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는 방랑객입니다.

흘러가는 구름도 지나가는 바람도 부러워할 삶이라도 그의 사색은 깊어만 갔고 어느덧 방랑벽을 멈추게 한 곳을 만나 유명을 달리 했는데요.

그곳이 화순군 동복면 정치업의 사랑채였습니다.

동몽교관 백인당 정치업의 6세 손 강제 정시룡이 살던 집을 늘 그렇듯이 마치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며 화순 적벽을 그리워하다 방랑벽을 멈추었는데요. 저승에서도 묵담 가인 김삿갓의 짚신은 여전히 닳고 있을 것 같습니다.

1863년 유명을 달리한 김삿갓을 친히 장제를 치르고 3년 뒤 후손에게 유해를 인계해 김삿갓의 인덕이 좋음을 알게 했는데요.

정시룡의 하늘 같은 덕이 지금 이 자리에 있고, 가옥은 압해 정씨 창원군 백인당파에서 11세 277년 동안 살다 2005년 화순군 난고 김병연 종명 초분 유적지 조성에 협조하면서 양도했다고 합니다.

고향인 경기도 양주에서 삿갓 하나 쓰고 화순까지 그야말로 발길 닿는 곳으로 가니 화순 적벽이 난고를 멈추게 했고, 태고의 자연의 신비가 숨 쉬는 적벽의 무상함이 그간의 쉼표가 되었던지 마음에 어른거려 6년의 세월을 바람처럼 살았고, 그 삶 다한 날 화순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니 그 기운이 좋은 것은 시절이 지나도 여전합니다.

난고의 방랑벽은 어디서 왔을까?

고향 양주에서 안동 김씨 후손으로 더할 것 없이 태어났지만 홍경래 난이 시발점이 되어 폐족으로 거처할 것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가족이 다시 모이게 된 곳이 강원도 영월이었고, 그때 나이는 6살이라니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에서 20대 초반 영월의 산천초목이 그를 키웠으니 영월에 깃든 난고의 감성을 김삿갓 문화제로 승화시켰네요.

화순 역시 난고의 추억 깊은 곳을 시가 있고 이야기 있는 '김삿갓 문학 동산'으로 애틋하게 조성했습니다. 난고의 시선이 닿는 곳에 저 멀리 화순 적벽이 있는 듯 아련하네요.

가난한 봇짐 안에 붓과 먹을 도시락처럼 챙겨 끼니 채우듯 세상 읊조리며 한 자 한 자 적어내니 시가 되었네요.

지나가는 바람과 못다 한 이야기를 말하듯 순하게 쓴 시비들이 동산이 되어 연고의 심정을 알게 합니다.

산천은 변함이 없고, 흐르는 내도 제 할 일 하는데 그때 그 순간 김익순을 비판한 글, 시제는 '홍경래의 난 때 농민군에 붙잡혀 목숨을 구걸한 선천 부사 김익순의 죄를 탄하라'였는데, 연고는 '한 번 죽어서는 그의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라고 써 장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탄식할 일은 사실 선천 부사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충격이 산이 되고 하늘이 되어 차마 감출 수가 없고 세상을 바로 볼 수도 없으니 24세에 혈혈단신 삿갓 속에 지난 날을 숨기고 시작한 방황이 방랑이 되었을 테죠. 지팡이는 어두운 세상 불 밝히는 길손이었을 듯합니다.

​김삿갓이 3년 간 묻혔던 초분은 마을 뒤 야트막한 동산에 다정하게 있는데요, 3년 뒤 후손들에 의해 영월로 이장해 가고 지금은 파묘 터만 남았습니다.

화순 김삿갓 종명지와 연둔리 숲정이는 서로 이웃 동네로 두 곳을 같이 보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화순에 오시거든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

※ 본 게시글은 전라남도 SNS 관광 기자단 김정아 기자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 이건어때요?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