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거부와 부정 또한 삶을 성장시킨다

입력 2019.04.18. 15:30 수정 2019.04.18. 15:30 댓글 0개
인문지행-심옥숙 박사
이반 투르게네프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우직하기가 비할 데 없는 자연의 성실함이 새삼 경이롭다. 여건이 어떠하든 때가 되면 자연 속 모든 생명들은 조용히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제 몫의 새싹과 꽃대를 끌어 올리면서 어김없이 제 할 일을 한다.

서로 다른 것들이 탈 없이 어울려서 피어나는 모습이 사람 사는 모양새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 때로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갈등과 반목으로 서로에게 남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시 상처를 주는 잔인한 세상에 여전히 봄이 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생명을 품어서 길러내는 것,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한낱 인간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찮은 일로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의 언어로 공격해도 무궁한 생명의 힘은 파괴할 수 없음을 봄을 통해서 배우라는 뜻일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평생 연인-폴리나 비아르도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3대 소설가로 꼽힌다.

이 두 작가에 비해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과소평가 되지만 전제 군주 체제와 농노제도로 인한 제정 러시아 말기의 사회 모순을 누구보다도 사실적으로 파헤친 작가다.

영락한 귀족 가문 출신인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수천 명의 농노를 거느린 대지주 귀족 출신으로 어린 투르게네프가 보는 앞에서 농노들을 종종 학대했다고 한다. 당시의 농노는 주인의 소유물로서 인간의 모습을 했을 뿐 가축과 다르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

투르게네프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면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평생 잊지 않았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작가가 되어서 농노들의 비참한 삶을 깊이 있게 묘사하는 작품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투르게네프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아버지와 아들>이다.

투르게네프의 무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다른 세상을 원하며 대립적 생각을 가진 두 세대가 어떻게 충돌하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갈등은 원래 제목인 <아버지들과 아들들>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한 집안에 국한된 사사로운 갈등 이야기가 아니고 시대적 변화에 직면한 세대가 처한 상황이다.

작품은 대학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들은 혼자서가 아니고 말과 행동에서 거침없이 솔직하고 때로는 건방져 보이는 친구 한 사람과 함께 돌아온다. 아들이 친구이긴 하지만 몹시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다.

그런 아들 세대를 아버지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렵고 조심스러워하고, 집안의 어른인 큰아버지는 못마땅하고 무례하다고 여긴다. 누구 앞이건 당당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왠지 나이든 세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큰아버지는 자신들이 힘들게 지켜온 규범적 관습을 젊은 세대가 함부로 비웃으며 시대착오적인 ‘유물’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증오심마저 느낀다. 

반면에 젊은이들에게는 아버지들이 자신들의 방식만을 유일한 진리의 신주단지로 모시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급기야 아버지들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가치와 원칙들을 거부하고 부정하면서 쓸모없는 과거의 족쇄는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나선다.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큰 아버지는 젊은 세대에게는 재수 없는 ‘꼰대’일 뿐이다. 그는 언제나 정장을 차려 입고 예술을 말하며, 젊은 시절에 만났던 아름다운 눈매를 가진 여인을 평생 잊지 못하고 젊은이들을 보면 훈계와 지적질을 일삼는다. 이런 큰 아버지는 쓸 데라고는 아무 짝에도 없이 나이만 많은 바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마지막 장면을 그린 그림(페로프, 1874)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지켜 온 삶의 양식을 아들들에게 물려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아들들은 아버지들에게서는 더 이상 배울 것도 물려받을 것도 없다고 맞선다. 아버지 세대의 권위를 부정하고 거부하며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젊은이들을 투르게네프는 ‘니힐리스트’라고 말한다. 니힐리즘은 의미 상 허무주의지만 단순히 기존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공허한 파괴만을 뜻하지 않는다. 전통적 도덕 가치와 낡은 생활양식이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막는 장애물이라는 비판의 의미가 더 크다.

이렇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잘못된 것들을 허물어야 한다는 생각은 1860년대의 러시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다. 러시아의 니힐리즘은 러시아 농노제가 위기에 봉착하고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던 시기에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확산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젊은 세대의 니힐리즘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저항정신의 한 표현이다.  

아버지와 아들 -한국어판
그러나 낡은 것을 허무는 데에는 니힐리즘이 유용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서로에 대한 거부감과 단절만으로는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 차이에도 이어지는 끈이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다. 큰 아버지가 옛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을 두고 철없는 낭만이라고 비웃던 젊은 니힐리스트도 어느 날 뜨거운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다.

하지만 일체의 권위와 비과학적인 감정을 거부한다는 자신의 원칙 때문에 사랑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의 감정과 화해한다. 냉정한 니힐리스트가 세상과 화해하는 순간이다.

고집스럽던 큰 아버지 역시 자신이 더 이상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런 과정이 삶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는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한 것”이라는 마지막 문장에 담겨져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된 일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신화에서부터 아들은 아버지의 세계를 부정하면서 성장하는 운명임을 보여준다.

아버지라는 세상을 넘어서야 아들은 성장하고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서 자신의 아들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다. 이렇게 삶은 부정과 거부의 힘을 통해서 순환하고 성장한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는 두 가지다.

아들들에게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과거의 세대를 부정하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더 더욱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갈등과 부정을 화해의 길로 승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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