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이 개운함, 양방언·국립국악관현악단 '아리랑 로드'
입력 2019.03.22. 17:44 댓글 0개【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처연하게 광활한 중앙아시아가 자연스레 상상됐다. 1930년대 옛 소련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명령을 받고, 먹먹한 심정으로 맞닥뜨린 곳.
21일 밤 서울 신천동 롯데콘서트홀에서 국악관현악 교향곡으로 이들을 위로하는 여정이 펼쳐졌다. 국립극장이 '양방언과 국립국악관현악단-인투 더 라이트(Into the Light)'에서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를 선보인 자리.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인 크로스오버 뮤지션 양방언(59)이 처음 작곡한 국악관현악이다. '디아스포라'는 정치·종교적 이유로 삶의 터전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 수 밖에 없었던 공동체 집단을 뜻한다.
재일동포 2세로 역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산 양방언은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아리랑'을 소재로 총 7악장을 써내려갔다.
이주 명령을 듣는 고려인의 심정을 표현한 2악장 '선고'는 무겁고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운 선율이 중심이다. 애조를 띤 거문고의 묵직한 저음이 가슴을 후려쳤다.
마치 기차의 기적 소리를 표현한 듯한 대금의 울부짖음이 깃든 3악장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선율들은 초반에 비교적 단순했는데 점층법처럼 멜로디와 리듬이 쌓이더니, 박진감 넘치게 끝나는 구성이 일품이었다. 철마가 무대 위로 스쳐가는 듯했다.
발군은 5악장 '잃어버린 아리랑'. '연어아리랑' '빠뜨라크 아리랑' 등 고려인들이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선율은 사라지고 가사만 전해지는 아리랑을 새로 작곡했다.
해금의 안수련 악장과 대금의 문형희 악장이 각각 여성과 남성의 독창을 맡았는데 담백함이 일품이었다. 연주 단원들이 악기가 아닌 목소리로 조심스레 함께 토해내는 합창 부분은, 밀물처럼 서서히 곡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가야금, 해금, 대금 등의 소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아리엔느의 실과 아리랑'에 이어 마지막 악장 '디아스포라, 인 투 더 라이트'에서는 메인 테마가 반복, 변주되면서 곡의 서사를 확장시키며 완결성을 이룩했다.
보통 국악관현악곡이라면 어렵다는 인식에 마음과 귀가 움츠러들게 마련이지만 아리랑을 모티브로 다양한 음과 리듬의 고저를 부드럽게 낚아 천변만화하는 음색들은 공연장 곳곳에 흩뿌려졌다.
특히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 현악기에서 줄을 짚어 여러 가지 음을 내는 농현이 클래식음악 전용홀인 롯데콘서트홀 음향을 타고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아픔을 안은 이들의 열은 때로는 너무 뜨거워서 들뜨게 된다. 무대 위 연주자는 물론 객석의 청중마저 음들을 삼키면서 그것을 식혀주고, 동시에 슬픔으로 비어 있는 것을 채우게 만드는 연주.
덜컹덜컹 떠돈 전력이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그 아픔과 슬픔은 한(恨)으로 번역되는데, 그 한을 온전히 통역할 수 있는 것은 아리랑. 국립국악관현악단이 들려준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는 그 통역된 내용을 완전히 해석한 자리였다. 일종의 연주 여행이었는데, 위로가 돼 여독은 없었다. 한 번으로는 아쉬운 공연이다.
악장 사이 청중의 박수가 흐름을 끊기도 했지만 국악관현악에서 40분가량의 긴 호흡을 작곡가, 연주자, 객석이 공유하는 드문 기회였다.
보통 연주회에서는 메인 프로그램이 2부에 배치된다. 이날 공연에서는 메인 프로그램 격인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가 1부로 전진됐다.
황금색 빛나는 재킷을 입은 양방언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 2부에서는 '야상월우' '바람의 약속' '블랙 펄' '플라워스 오브 K' 등 그의 대표곡이 울려 퍼졌다. 양방언이 만든 국악관현악의 근원을 거꾸로 탐색할 수 있는 이런 구성은 색다른 시도였다. 현재와 과거의 화음이 구석구석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절정은 앙코르로 들려준 '프런티어'. 양방언의 피아노가 비상하는 가운데, 플라멩코 기타 연주자 오키 진의 절정에 달한 리듬감, 얼후의 대가 지아펭팡의 목 놓아 울부짖음, 박력 있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연주가 맞물리면서 음들이 만개했다.
부산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최수열이 지휘했다. 클래식음악에서 고전은 물론 현대음악 그리고 국악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그는 이날 연주의 담백함과 흥을 살린 공신 중 한명이었다.
2000석의 객석은 가득 찼고, 국악 공연인데 외국 청중도 눈에 많이 띄었다. 커튼콜에서 객석의 환호는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국악관현악단의 대중화 또는 대중의 국악관현악단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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