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의병장 고경명이 무등산을 즐겼던 방법

입력 2019.02.22. 15:32 수정 2019.02.25. 15:13 댓글 1개
[광주스토리100] 유서석록

'갑술년(1574년) 초여름 광주목사 갈천 임선생께서 한가한 날 빈객들과 함께 서석에 오르려 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글월을 보내어 나를 초청해왔다. 나는 어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4월 20일 산에 오를 행장을 갖추어 먼저 증심사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서석은 우리 고을 광주의 진산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깎아지른 듯한 깊은 숲, 그윽한 시냇물 등 도처에 내 발자취를 남겨놓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왔기 때문에 산에 대한 묘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나무하는 시골 아이나 목동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혼자 올라 상심만 하다면 유의조(당나라 시인)가 남녘의 산골짜기에서 슬픔을 읊조리던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산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거니와 더구나 산의 정취를 얻는데 미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 『유서석록』, 1574년 4월 20일 中에서

이 글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제봉 고경명이 1574년(선조 7) 음력 4월 20일부터 4박 5일간 74살의 광주 목사 임훈(1500~1584) 일행과 무등산을 유람하면서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의 첫 대목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호남 최초의 의병장이 되어 전장에 나아갔으나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우리는 고경명을 의병장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한 선비였다. 25살에 문과에 급제해 호조좌랑과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을 지냈던 그는 41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시서詩書에 묻혀 지내며 자연을 벗 삼아 산수를 유람했다. 그때 쓴 글이 「유서석록遊瑞石錄」이다. 당시 무등산을 '서석산瑞石山'이라 했으니 '유서석록'은 '서석산 유람기'라는 의미이다.

증심계곡-무산등 중머리재의 신림골에서 발원하여 증심사 옆 계곡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광주천에 합류하여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여름철 광주시민들의 대표적인 피서지였다.

고경명이 오른 무등산의 모습 

400여 년 전, 제봉 고경명이 무등산의 골짜기와 봉우리를 오르며 쓴 기행문 「유서석록」. 과연 조선시대의 무등산은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리고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고경명을 따라 4박 5일 무등산을 오르며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한다. 

증심사 계곡에서 탁족을 즐기다! 

'발길을 재촉하니 정오도 채 못 되어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누교樓橋 위를 큰 나뭇가지가 덮고 수목이 울창하여 바위는 더욱 웅장하게 보여 물소리도 요란하니 차츰 좋은 경지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로 말 등에서 내려 저고리를 벗고 시냇가로 내려가 발을 담그고 저 옛날의 창랑가滄浪歌를 외우며 소산이 지은 초은의 가락을 읊으니 상쾌한 기운이 살갗에 스며들고 번거롭고 괴로운 마음이 사라져서 그야말로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었다.' 

- 「유서석록」, 1574년 4월 20일 中에서

증심사 입구에 다다른 고경명은 말에서 내려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즐긴다. 옛 성현들에게 탁족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인격수양을 뜻했다. 고경명도 탁족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며 계곡에 발을 담궜으리라. 지금도 증심사 앞에는 계곡이 흐른다. 400여 년 전처럼 탁족을 즐기는 이들은 없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여름이면 계곡에 발을 담그고 수박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입석암은 언제 사라졌을까?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중략) 돌의 형세를 보니 뾰족뾰족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가운데 헤아려볼 수 있는 분명한 것이 16개 봉우리다. 그 속에 새가 날개를 펴듯, 사람이 활개를 치듯 서 있는 건물이 암자이다. 입석암立石菴은 입석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우러러 보면 위태롭게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바위 밑에 샘이 두 곳 있는데 (중략)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 「유서석록」, 1574년 4월 21일 中에서

첫날 증심사를 출발한 고경명은 둘째날 입석대에 도착했다. 지금이야 등산로가 잘 닦여서 하루면 무등산을 오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길이 좋지 않았을 터. 구불구불한 오솔길과 돌길을 힘들게 올랐을 것이다. 입석대에 다다른 그는 입석대를 보고 석수장이가 먹줄을 퉁겨 깎아 세운 듯 하다 했다. 표현이 참으로 멋스럽다. 그런데 입석대 한가운데 암자가 있었다니 정말 놀랍다. 그 바위들 사이에 어떻게 암자가 들어섰을까? 언제 어떻게 생겨난 암자인지, 언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암자의 스님이 마셨던 석간수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등산객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유서석록」에는 입석안을 비롯해 지금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암자와 사찰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서석대 주변에는 삼일암三日菴, 금탑사金塔寺, 은적사隱迹寺, 석문사石門寺, 금석사錦石寺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 마디로 서석대 주변이 하나의 절촌이었던 셈이다. 당시 사람들은 가문의 안녕과 번영을 빌기 위해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찾았다. 

무등산의 정상,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무등산 정상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이 그것이다. 지금 이곳은 군부대가 들어서 있어 1년에 2번 정도만 개방하고 있다. 그래서 더 그립고 오르고 싶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400여 년 전 무등산의 삼봉三峯은 어떠했을까?

'상봉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동쪽이 천왕봉이며 가운데 것을 비로봉(지왕봉)이라 한다. 그 사이는 백여 척쯤 되며 평지에서 바라보면 대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서쪽에 있는 것이 반야봉(인왕봉)으로 비로봉과 두 정상의 거리는 무명베 한 필 길이나 되지만 밑은 겨우 한 자 거리쯤 밖에 되지 않으니 평지에서 바라보면 화살촉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략) 반야봉 낭떠러지 위 언저리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과연 우화등선羽化登仙 하는 기분이다.'

- 「유서석록」, 1574년 4월 22일 中에서

고경명은 등반 사흘 만에 정상에 올랐다. 반야봉 절벽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니 우화등선羽化登仙,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 기분이라고 적고 있다.

규봉의 광석대는 남쪽에서 제1경이라!

오늘날 무등산의 삼경三景으로 입석대, 서석대, 규봉을 꼽는다. 그렇다면, 16세기에는 이곳이 어땠을까? 고경명은 서석대를 '낭떠러지의 서쪽에 참빗살처럼 서 있는 돌무더기'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규봉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하당-고경명은 무등산 유람에 나섰는데 화순 적벽을 거쳐 담양 식영정과 서하당에 도착했다. 유서석록에 '밤에 서하당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놀다 흥이 다해 자리를 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윗골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암석의 기묘하고도 오래된 폼이 입석과 견줄 만하다고 할 수 있으나 폭이 넓고 크며 형상이 진기하고도 훌륭한 점에서는 입석이 이에 따를 수가 없다. (중략) 무릇 규봉암의 빼어남이 서석에 있는 모든 암자 가운데 으뜸이라면 광석대 또한 규봉 10대 가운데 가장 빼어났으니 남쪽에서 제일경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 「유서석록」, 1574년 4월 22일 中에서

 고경명은 규봉과 규봉암 일대를 입석대, 서석대와 비교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현존하는 무등산 사찰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규봉암. 규봉암은 그 빼어난 절경 때문에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당시 고경명도 이곳의 경치에 완전히 반했나 보다. 특히, 규봉암을 둘러싸고 있는 은신대, 삼존석, 십이대, 광석대 등의 기암괴석 중에서 광석대를 남쪽의 제 1경이라 했으니 말이다. 

무등산 자락에서 소박하게 사는 영신골 사람들 

'광석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송하대가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비스듬히 뻗은 산등성이를 타면 영신골인데 그리로 가면 오솔길이 꼬불꼬불 줄을 그어놓은 것 같다. (중략) 이곳 두메산골의 주민들은 띠집을 짓고 돌밭을 일구어서 먹고 살며 개나 닭의 소리는 서로 잊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경치의 아름다움은 중국 무릉의 주진촌도 여기에 미치지 못할 듯 싶다.'

- 「유서석록」, 1574년 4월 23일 中에서

등산 나흘째 되던 날, 고경명은 광석대 아래 영신골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동네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중국 무릉의 주진촌과 견주어 표현했다. 영신골은 현재 광석대 아랫마을인 화순군 이서면 영신마을을 말한다. 이 마을은 600여 년 전에 형성된 동네로 푸르스름한 이끼가 낀 돌담을 끼고 골목을 나서면 빨래터가 있다. 지금은 시골에서도 보기 드문 옛 풍경을 간직한 마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3호로 지정됐다. 규봉의 광석대와 그 아래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영신골의 풍경을 극찬한 고경명.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산아래 살아가는 영신골 사람들의 소박한 삶이 그려지는 듯 하다. 

21세기, 나만의 「유서석록」을 남겨보는 건 어떨까?

고경명 일행은 여행의 마지막 밤을 식영정息影亭에서 보낸 후, 24일 환벽당에 오른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술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식영정과 환벽당, 서하당 등 인근의 문인들이 모두 모여 고경명 일행과 함께 술자리를 벌였다. 흥건히 술에 취한 그는 '유서석록'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니 한바탕 남가일몽을 꾼 것 같다. 빈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서석의 영봉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다.'

- 「유서석록」, 1574년 4월 24일 中에서

식영정-유서석록에 따르면 고경명은 '식영정에 올라 술자리를 열었다. 술잔이 오가며 환담과 해학이 벌여졌다.'며 소나무 아래 만취하여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고 적고 있다.

16세기, 무등산의 풍광을 명문장가 고경명을 통해 만나는 기쁨과 감회는 각별하다. 시절이 변했고 인심도 변했으니 산천인들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파란의 역사를 살아야 했던 고경명에게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무등산이 주는 기쁨의 총량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21세기에 쓰는 나만의 유서석록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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