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책을 읽고 소통하며 즐겁게 사는 공부하라

입력 2019.02.21. 18:28 수정 2019.02.21. 21:09 댓글 0개
인문지행의 세상읽기
내 생각을 바꾸고 싶어 한다면

# 사람의 생각도 변할까?

오전 시간은 참 빨리 지난다. 특히 무엇인가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새 오전은 간다. 몇몇 지인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소설 낭독을 하고 이를 녹음하다 보니 12시가 지났다. 익숙하게 겨울 검은 패딩을 걸치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아나서는 데, 이른 봄 햇살이 눈부시다. 문을 나서면서 습관처럼 손에 끼었던 피부를 누르는 장갑을 벗는다. 유난히 중력을 느끼는 묵직한 겨울구두가 발 맞춰 따라오지 않는다. 맑은 하늘을 본다. 봄빛이 내린다. 바람이 머리칼을 따라 온다. 어제 밤만 해도 온몸이 반응하던 차가운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할머니 얼굴처럼 낯익은 봄빛이 그냥 내려오고 있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면서 제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알 수 없는 시간은 항상 우리의 생각을 앞서가는 것 같다. 오는 봄을 맞이하듯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아 본다. 시간이 가면 사람의 생각도 변할까?

써놓고 보니 질문이 좀 황당해서 당황스럽다. 생각이 변하는 거냐고 묻다니, 생각처럼 잘 변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너무 자주 변해서 문제가 아닌가. 아침에 한 생각이 다르고 점심때 한 생각이 다를 수 있지 않는가? 허긴 그렇기도 하지만 위에서 뜻하는 생각은 좀 다른 생각이다. 이 생각 저 생각한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바로 생각을 하게 하는 근본이 되는, 어떤 한 사람의 생각의 토대가 되는 생각을 말한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 여부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변화 가능한 것이냐고 묻는 생각은 생각의 생각을 묻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한 사람의 생각의 기본이나 토대가 되는 생각으로서 생각을 만들어내는 생각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겠다. 영산강의 시원이 다르다면 다른 영산강으로 흐를 것처럼 생각의 시원이 다르면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 사람들의 생각은 바꿀 수 없을까?

우선 시원으로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힘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 생각의 시원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하는 능력을 천부적으로 가진 것처럼 어떻게 해서 그 생각의 시원을 갖게 되었는가? 라는 물음은 또 많은 이야기를 부를 것이다. 그런데다 자신의 생각의 시원에 대해서 뚜렷하게 어떻게 해서 갖게 되었다고 아는 것도 어렵겠지만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내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생각의 변화를 말하면서 각자의 생각의 시원을 인정하면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약간 편법을 써보자.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각의 토대를 가지고 있지만 비슷한 것끼리 묶어보면 대나무처럼 일정한 묶음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을 기본 생각의 유형(類型)이라 해보자.

기본 생각의 유형 역시 여러 스펙트럼으로 나눠질 수 있지만 개인들이 갖는 다양한 생각의 차이가 갖는 거의 무한한 나열보다는 일정한 패턴으로 수렴될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의 생각의 유형은 아주 멀리 오른쪽 끝에 서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왼쪽 끄트머리에 간신히 서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우파, 좌파 그리고 중간 이렇게 단순화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쓰다 보니 솔직하게 쓰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쓸까 생각하다 떠 오른 게 요즘 매우 극단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을 생각의 생각에 대해서 아주 궁금해졌고 더욱이 그 생각이 변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왜 그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더 오른 쪽 벼랑으로 외곬으로 달리는가? 그렇지 않아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앞날도 있는 것만큼도 맑게 보지 못하며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또 한 번 정신적으로 패대기를 치는가?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생각은 도대체 바꿀 수 없는 것인가?

체코 문학의 거장 보후밀 흐라발(1914∼1997)

# 주변을 보살피지 않는 사람이 ‘바보’

보후밀 흐라발의 표지

체코 공산주의 시절 압축기로 책을 폐지하는 일을 하기도 했던 노동자 겸 작가 보후밀 흐라발은 이라는 책에서 집중하여 일을 하다가 사장으로부터 ‘바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일할 열정을 잃는다고 썼다. 기운도 가라앉고 살 기분이 나지 않는다 한다. 그러니 바보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단어가 분명하다. 우리말에서 바보라는 말은 밥그릇을 축내기만 할뿐 무위하는 사람, 즉 밥값을 못하는 사람에게서 왔다고 한다. 그러니 소비만 하면서 막상 쓸데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도 바보로 머물기만 해도 다행이다. 이런 바보는 귀엽기라도 하다. 차라리 밥만 축내고 더 나아가지 않으면 좋으련만. 자꾸 오른쪽으로 마치 눈을 감은 채 벼랑으로 스스로 가고 있는 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차라리 바보가 되라. 함께 살아야 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그러려면 생각의 생각을 바꿔야 할 텐데.

영어의 idiot가 그리스어 이디오테스로부터 왔다는 설명

그런데 그리스인은 바보를 조금 다른 뜻으로 썼다. 영어에서 말하는 바보의 의미 ‘idiot’는 그리스어 ‘이디오테스’에서 왔다고 한다. 원래 이 말은 특별하다는 뜻으로 남과 다르다는 뜻을 갖는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즉 마땅히 사람으로서의 사람과 다른 좀 특별한 사람, 다시 말하면 그냥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이어야 하는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이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 관심을 갖고 그 일에 대하여 제대로 알아야 사람으로서 사람이지, 가짜 뉴스에 휘둘리거나 참과 거짓을 구별해 낼 줄 모르는 사람은 좀 특별한 사람, 즉 ‘이디오테스’라고 보았다.

# 생각을 바꾸는 길은 ‘함께’하는 공부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 바보 아닌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일반 사람이 아니고 보통 사람이 아닌 경우 그 사람을 바보라고 한다면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 다른 사람이며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내가 바보이니 어쩌라고? 그럴 순 없다. 그걸로 만족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며, 부족한 면을 갖지만, 사람이기에 갖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자기 생각의 시원을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칸트의 생각을 빌리면, 사람은 스스로 존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존엄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스스로 존엄한 사람이라고 용감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켜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생각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물론 사람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사람이기는 하지만 모습이 주는 사람임을 넘어서서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생각의 생각에 대해서 고민해보아야 할 때이다.

그러니 ‘나는 사람이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마땅한 사람의 모습과 생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바로 그 사람의 모습과 생각 속에서 나를 발견하려고 할 때 생각의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당연한 사람으로서 채워야 할 것을 알고 채워나가는 것이 생각의 시원을 바꾸게 하는 길이 아닐까?

이제 자신의 생각이 올곧고 바른 제대로 된 생각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고민하는 것은 혼자서 이리저리 마음속에서 거닐다가 부질없이 버리는 생각에서 나아가서 더불어 다른 사람과 생각을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 사람은 혼자서 주체로 설 수 없다. 서로 주체라는 길로 함께 걸어야 한다. 원래 사람은 함께 세상을 만들어왔다. 그러니 고민한다는 것은 결국 더불어 공부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후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자신의 생각의 시원을 고집하며 거기에 만족하는 특별한 사람이다. 바보다. 이들은, 먹고 사는 일에 전념하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며 위로한다. 제대로 먹고 살고, 먹고 사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의 시원을 알고 그것을 제대로 된 것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즐겁게 사는, 공부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만약 당신의 생각의 토대를 바꾸고 싶다면.

박해용은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한 후, 한국연구재단의 연구교수로 한·중·일 3국의 의사소통 구조를 연구했다. 현재 를 운영하며, 인문학 공동체 (사)에서 회원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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