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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나주에서 떠나는 시간여행

입력 2019.01.09. 13:41 수정 2019.01.10. 09:42 댓글 0개

전라남도 나주는 총면적 608.15㎢의 인구 11만여 명의 ‘작은 도시’ 답지 않게 ‘전라도의 중심 나주’, ‘천년고도 목사 고을’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전라도라는 이름이 전북 전주의 전(全)과 나주의 (羅)가 합쳐서 이뤄진 이름이라 하니 전라도의 중요한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성종 2년(983)에 전국에 12목을 두었는데 나주목이 되었습니다. 고려 현종 9년(1018) 8목으로 개편되면서 전남지방에서 유일하게 나주만이 목이 되어 이 지방의 중심지로 10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전라도의 중심지 나주을 둘러본다면 옛 나주읍성 안에 자리 잡은 금성관, 나주목문화관, 나주목사 관아(금학헌), 나주향교, 나주 읍성 서성문을 차례로 둘러보는 코스로 잡으면 됩니다. 나주 여행의 첫 출발점으로 나주목문화관으로 이동했습니다.

▲나주목문화관

나주목문화관은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관입니다. 옛 금남동사무소를 개조하여 만들었으며 2006년 10월에 개관했습니다.

어향나주 목이 되다, 나주부사 부임행차, 나주읍성 둘러보기, 관아줄러보기, 다시 태어나는 나주 등 8개의 주제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지방행정 단위였던 ‘목’에 관한 설명이 있습니다. 목이란 고려,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단위로 고려 시대 중앙집권 정책으로 지방의 주요거점지역에 목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성종 2년(983)에 12목 중의 하나인 나주목이 되었고 고려 현종 9년(1018) 8목으로 개편되었습니다. 1895년 근대적 행정제도 개편으로 나주 관찰부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금과 같은 도시가 되면서 광주로 중심지가 이동하였습니다.

나주목사 부임행차는 목사 행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나오는 관찰사 행차를 참고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나주목사가 부임하여 올 때면 나주목에 근무하던 관원들이 모두 나와 함께 했다고 합니다. 나주삼현 육각이 연주되어 대단한 위용을 갖춘 행차였었답니다.

나주읍성 모형도를 보면 남쪽에 야트막한 막산이 자리 잡고 있고, 영산강의 지류인 나주천이 흐르는 지형상 한양도성과 많이 닮았다 하여 작은 서울이란 뜻으로 ’소경‘이라 불리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먼 한양까지 못 가고 나주를 찾아 서울 구경을 대신하기도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320명에 이르는 목사 명패와 목사의 하루 일정 등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정수루

밖으로 나와 왼쪽으로 가면 19세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조선 시대 나주목 관아(동헌)의 정문인 ‘정수루’가 보입니다. 이곳을 통과해야 나주목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복룡 목사가 건립하였다고 <군지郡誌>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민백남 목사가 1753년에 건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은 1층의 양 측면만 벽체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는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2층의 커다란 북은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요? 정수루의 북은 나주 목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던 구원과 호소의 염원을 담아 치던 북이라고 합니다. 신문고의 역할을 하던 북은 나주목사 김성일(재임 기간 1583.6 ~1586.10)이 부임 초기 정수루에 매달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 호소할 것이 있는 사람은 북을 울려 직접 알리게 했다고 합니다. 선정을 베풀고자 하는 애민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북입니다.

▲목사내아 금학헌

정수루와 반대편으로 넓은 잔디밭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그 오른편에 목사내아 금학헌이 있습니다. 금학헌(琴鶴軒),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백 년 된 팽나무가 있는 집입니다. 내아는 조선 시대 지방 관아의 안채를 지칭합니다. 목사가 집무를 보던 곳은 동헌(외동헌), 내아는 내동헌이라고 불렀답니다. 금학헌은 나주목사가 거주했던 내동헌으로 살림집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목사가 정무를 보는 동안 거쳐할 곳으로 지어진 곳이라 여겨진답니다. 정면 6칸, 측면 3칸, 건평 41평 규모로 본채와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진각 형식으로 북쪽과 남쪽의 지붕을 들어 올려 보기에도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건물이었습니다.

2009년 5월부터 숙박 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활용되면서 많은 사람이 예약하는 등 인기가 무척 많다고 합니다. 1박 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하여 더 인기가 많답니다. 특히, 나주목사 가운데 존경을 받았던 유석증 목사와 김성일 목사의 이름을 딴 방이 있었습니다. 마당 중앙의 호두나무는 선비의 강건함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확 들어오는 소원나무가 있었습니다. 오백 년 된 팽나무로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졌지만 꿋꿋하게 살아남아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소망을 품어 주는 소망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주향교

목사내아를 돌아 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나주향교가 나옵니다. 전국 최고의 향교로 보물 제394호인 향교입니다.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398년(태조 7년)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답니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입니다. 나주향교는 내부에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서 일반 향교와 배치 구도가 다릅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여 배움의 공간을 앞에 두고 뒤에 제사 공간을 두는 전학후묘의 형식인데 이곳은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가 바뀐 전묘후학을 따르고 있습니다.

향교를 찾은 시간에 마침 청소를 하느라 대성전의 문이 열려있었습니다. 대성전 안을 둘러보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수령 600년이 넘은 한 쌍의 은행나무도 보았습니다.

나주향교도 대부분의 향교가 그렇듯 사대문 밖에 있어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잡다한 시류와 소음에서 벗어나 유학 정진에 전념을 다 하도록 했습니다.

나주향교의 이야기 중 재미있는 것은 나주향교를 창건하면서 중국의 목수가 공수되어 중수했다는 것과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연에서 가져온 흙으로 벽체를 발랐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나주향교의 규모는 성균관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성균관 대성전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 대성전을 그대로 보고 증축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나주향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문화해설사님은 그만큼 나주향교의 위상은 대단했다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주변 어디를 걷더라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길을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옛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고즈넉한 나주읍성 주변 여행이었습니다.

[출처] 천년고도 나주 읍성 주변 둘러보기|작성자 남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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