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하나의 기준과 기준 상실 사이에서

입력 2018.12.14. 10:53 수정 2018.12.14. 11:10 댓글 0개
최행준의 2018 시민자유대학 미술제- 따로 또 함께

미술은 좋은데 현대미술은 싫어! 한 미술 애호가의 말이다. 백화점의 아트홀, 아트페어, 문화센터의 실기강좌는 좋지만 ACC, 비엔날레, 미디어 아트는 싫다고 한다. 현대미술은 난해하고 불쾌하다. 무엇보다 아무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미술 애호가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는 현대미술이 한편으로는 너무 어려워서(난해해서) 싫고, 한편으로 너무 쉬워서(아무나 만들 수 있어서) 싫다.

현대미술이 너무 어려운 이유는 직관보다 사고를 요하기 때문이고, 너무 쉬운 이유는 기능적 숙련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미술 애호가가 그 동안 찾아다니며 배우고 애호한 미술은 사고보다 아름다움의 직관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아름다움의 직관과 기능적 숙련을 강조하지 않는다.

미술을 글자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기술이고 동서고금의 미술작품을 보면 저마다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우리가 애호하고 기억하는 미술사의 모든 작품들은 한 때 혁명이었다.

인상주의 작품이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매우 온건한 아름다움으로 보이지만 동시대인들에게는 비아냥의 대상이었다. 인상주의라는 말 자체가 순간적으로 나부끼는 인상을 그렸다는 비아냥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혁명의 힘이 미술사가 기리는 모든 작품들에 있다. 현대인의 눈에 아무리 온건하고 아름다워 보이더라도 그것은 한 때 동시대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미래에 우리시대를 대표할 예술 역시 지금 우리의 눈에는 혐오의 대상일 가능성이 크다. 동시대의 사고방식을 공격하지 않는 명작은 없다.

그렇게 보면 위의 미술 애호가는 혁명의 힘을 상실한 그림과 그리는 기술을 사랑하고 있다.

기막힌 회화 기술을 답습하며 전문 작가의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러나 전문 작가의 기술은 수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기능적 숙련으로 승부하는 그림은 특별한 재능을 요구하는데, 이 재능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숙련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루어낸다. 전문 작가의 길을 가는 사람 중에도 소수의 사람만 이런 재능을 갖는다. 그럼에도 일반 시민이 이러한 숙련의 길을 선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숙련에 매몰되어 기술의 길을 걸으며 예술을 길을 간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많은 전문 작가들이 서구의 거장들의 기술을 흠모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일반 시민들이 전문 작가들의 기술을 흠모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에 눈이 멀어 예술이 가진 혁명의 힘, 창의의 힘을 상실한 사람들이 긴 사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다단계에 빠져든 사람에게 체계의 밖은 없다. 유일한 희망은 체계 안에서 더 높은 단계에 오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기능적 숙련의 길을 갈 수는 있다. 그러나 골방에 처박히면 안 된다. 모두가 떠난 자리를 고집스럽게 지키려면 골방이 아니라 망루에서 지켜야 한다. 눈과 귀를 닫을 것이 아니라 눈과 귀를 크게 열고 자신의 길을 지켜야 한다.

광주의 미술판을 보면 한편에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이, 다른 한편에서는 온갖 잡동사니가 예술로 취급받는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이라는 하나의 기준과 모든 것이 예술이라는 기준 상실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없을까?

‘2018년 시민자유대학 미술제-따로 또 함께’는 하나의 기준과 기준 상실 사이에서 다양한 기준이라는 사잇길을 놓는다. 하나의 주류가 예술작품 평가의 기준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하나의 세계관, 도덕관이 지배하던 시대였으니 예술작품도 하나의 기준에 따라 평가된다.

물리적 힘도 종교적 신념도 지배의 전략을 상실한 오늘, 욕구를 조작하는 미디어의 힘이 지배하는 자본의 시대,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허무한 말을 넘어 무엇이든의 내용을 갈무리하고 각각의 무리 내에서 다양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다양한 기준 중 어떤 기준이 타당한 지는 앞에 놓인 작품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을 더 깊이 감상하고 알아간다는 것이란 상황과 맥락에 적합한 기준을 들이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미술제의 기획팀은 시민들이 도전해 볼만 한 과제로 재현, 표현, 아이디어, 입체 창작을 제시했다.

시민들은 광주시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나람미술캠프’에서 작품을 제작했다. 첫째, 재현은 낭만주의 이전의 대부분의 회화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사물을 부정하거나 변형하지 않는 것이다.

모방의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기준은 신이 만든 사물과의 유사성이다.

둘째, 표현은 외부의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 기준이다.

창작자의 내면, 이를 형성시킨 역사적 사회적 관계가 기준이다. 기준이 내면에 있으니 모호해진 듯 보이지만 내면의 가공으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가가 명확한 기준을 형성한다.

셋째 아이디어 중심 창작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창작 경향으로, 하나의 개념을 기발하게 조작하고 변형하여 그 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드러내는 미술창작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각이 복잡한 만큼 다양한 창작 방식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의 개념에 관한 생각의 깊이, 개념을 비틀어 새롭게 드러나는 의미 있는 아이디어가 기준이다.

넷째, 입체 중심 창작은 전통적인 재료와 장르를 탈피하여 재료 사용의 자유를 연다. 전통적으로 평면조형은 회화, 입체조형은 조소로 구분된다.

그러나 현대에는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한 재료의 혼합사용이 예술적 창조력을 배가한다. 재료와 장르의 고착성으로부터 탈피하여 그림이 입체가 되고 거울이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또 각목과 철사가 사용되고 회화의 요철이 평면성을 극복한다.

‘2018 시민자유대학 미술제-따로 또 함께’는 재현(조성숙 작가), 표현(정재형 작가), 아이디어(김용근 작가), 설치(이정기 작가) 부분 네 가지 채널의 작가와 시민들을 연결 했다. 시민들은 ‘함께 워크숍’ 2회, ‘따로 워크숍’ 5회를 통해 작가를 선택하고 작품을 제작했다.

시민자유대학 미술제에서 제시하는 영역은 네 가지에 불과하지만 현대미술은 이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저마다의 기준을 형성하고 있다.

용기 있는 시민 작가들 그리고 함께해준 전문 작가들이 구체적이고 다양한 기준을 선보인다. 작품들을 갈무리하고 적합한 기준을 들이대는 능력을 가늠해보자!

최행준은 전남대학교 철학과에서 미학을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과 다양한 교육기관에서 미술교육, 미술사, 미학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광대와 기생으로서의 예술 개념을 넘어 진실을 표현하는 예술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미지의복제와전송이자유로워진시대, 웹기반의직관적화면구성이 중요한 시대를 미학 또는 예술철학적 관점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전남대 코어 학술연구교수, 시민자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이건어때요?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