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호르헤 수도사

입력 2018.09.07. 18:17 수정 2018.09.07. 18:21 댓글 0개
김영태의 약수터 논설주간

호르헤 수도사는 고대로부터의 전해져 오는 비밀을 감추어야 했다. 나이든 장님인 그에게 비밀 유지는 숙명의 의무였다. 그 비밀 공개로 엄숙해야할 세상이 경박하고 잔망(孱妄)스러워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자기 확신 가득한 광신도적 기질은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움베르토 에코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장미의 이름’에서 경박함으로부터 세상을 방어하려는 수도사의 기이한 행적을 들춰냈다.

소설의 키워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제2권. 존재가 확실한 제1권과 달리 단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2권은 세상에 공개돼서는 안될‘금서(禁書)’로 규정됐다. 비극을 주제로 한 1권에 비해 2권의 대체적 주제는 인간의 즐거움과 행복에 관한 논고였다. 인간에게 굴레를 씌우고 옭아매는 신(神)의 계율과 말씀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내용은 희극에 가까웠다.

세상에 단 한권 남은 시학 2권은 이탈리아 북부 한 수도원(도미니크)의 도서관, 비밀의 방에 깊이 감춰져 있었다. 그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잇달아 죽는 의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에코 특유의 발군의 소설 구성력과 기발한 추리력에 의해 살인 사건의 전말은 드러난다. 사건 원인 규명에 나선 수도사(아드소와 윌리엄)들은 수도원의 실세, 늙은 수도사 호르헤가 쳐놓은 죽음의 그물망에 그들이 잇달아 희생됐음을 알아 차렸다.

죽은 수도사들은 하나같이 손가락과 혀가 검게 변한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들의 죽음은 비밀의 방에 감춰진 금서에 발라놓은 치명적인 맹독 때문이었다. 비밀의 방에 들어가 금서를 넘겨보려던 수도사들의 손가락에 맹독이 묻고 , 책 페이지를 넘기려 혀에 침을 바를 때 맹독이 스며들면서 죽음에 이른 것이다. 금서에 맹독을 발라놓은 이는 호르헤였다. 그 누구도 금서를 보지못하게 하고 설령 책을 읽었더라도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입을 봉하려 죽게 만들엇다.

사건의 원인을 알아낸 수도사들은 호르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금서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호르헤는 금서를 찢어 씹어 삼키며 수도사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등잔불이 넘어져 도서관은 불길에 휩싸인다. 금서를 찢어 입에 삼킨 호르헤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절규와 함께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죽어간다.

비극이 아닌 희극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은 결코 공유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의 소유자 호르헤. 그로 하여금 의도된(고의 혹은 미필적) 살인을 저지르게 한 신념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살인사건의 비밀을 알아낸 수도사들은 죽음을 불사했던 호르헤의 얼굴에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자신의 신념만이 진리이며 가치라 여기고 그것을 지키려 망상과 집착에 사로잡혀있는 이들. 호르헤 수도사처럼 ‘가짜 신념’을 고수하는 이들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김영태논설주간kytmd86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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