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옥천 세자매의 비극

입력 2018.09.01. 19:22 수정 2018.09.03. 08:22 댓글 0개

28살의 젊은 사형수가 있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그 에게 마지막 5분이 주어 졌다. 그는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고민 했다. 고민 하던 그는 마지막 5분을 이렇게 썼다. 우선 2분은 자기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했다. 오늘날 까지 살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에게도 한마디씩 작별 인사를 건넸다. 또다른 2분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는지 묵상 했다. 그리고 마지막 1분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 보았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최후의 순간까지 서 있게 해준 땅에 감사 했다.

그때 멀리서 나팔소리와 함께 펄럭이는 하얀 깃발이 눈에 들어 왔다. 곧이어 사형수에게 내린 형벌의 사면을 알리는 칙령이 공포 되었다. 사형 대신 그에게 주어진 벌은 시베리아 옴스크 유형지에서 4년 동안 중노동을 하고 다시 4년 동안 군대에서 병졸로 복무하라는 것이었다. 사형직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 사건의 주인공은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에프스키는 죽는 순간까지도 인간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 노력 했다. 특히 두 번째 사색은 아무나 할수 없다. 죽는 마당에 인간이 인간을 죽일수 있는 가를 고민 하는 것은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에프스키 답다. 사형수도 이런 의문을 품는 데 살아있는 사람은 더 말할 필요 없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을 죽일 권리가 있는가. 그것도 자식을.

지난 25일 충북 옥천에서 39세 부인과 10살, 9살, 8살 어린 세 딸이 숨진 채 발견 됐다. 모녀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죽어 있었다. 밝혀진 바로는 아버지가 범인으로 “빚이 많아 죽였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면 죽는다. 이 하나도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에도 품격은 있다. 폼격은 커녕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세 아이들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어린 생명을 죽일 권리가 있는가. 한 마디로 가당치 않다. 자식이 무슨 소유물인가. 이번 비극은 자식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몰상식에서 비롯 됐다. 거기다 돈이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천민 자본주의가 더해 졌다.

아무리 양보해도 자식은 누구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독립적 개체다. 빚이 많다 해서 어린 생명을 죽이는 짓은 짐승 만도 못하다. 고슴도치도 제 세끼는 예쁘다 하지 않던가. 짐승 만도 못한 아버지 만나 채 피지도 못하고 떠난 옥천 세 자매를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 생에서는 못난 애비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세상에 자식 낳고 사는 것이 부끄 럽다. 10살,9살,8살 어린 딸이 무슨 죄란 말인가. 이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 지 애비 빚이 많은데 왜 자식이 죽어야 하는 지 참 고연놈의 세상이다. 희망을 잃지 말자 했지만 말세는 말세다.

나윤수 컬럼 니스트 nys8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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