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역사의 현장과 유형의 가치

입력 2018.08.13. 16:40 수정 2018.08.13. 16:47 댓글 0개
김동하의 도시풍경 건축가
광천동 시민아파트를 그리다

역사는 시대마다 일어난 사건과 정신적 가치를 동시대의 흐름과 함께 교훈으로 얻기 위한 것이다. 기록으로 남겨 주목할 만한 일과 기억하며 남겨야 할 유형의 현장이 있다.

시간이 지나며 기억은 때론 망각으로 사라지곤 하지만, 도시와 건축은 그 형상으로써 유형의 가치를 시각화하기도 한다. 도시 공간과 기억 사이의 상호관계는 개인적 수준을 넘어서 시민과 집단차원으로 나아간다.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순례지로 ‘광천시민아파트’와 ‘광천동 성당’이 있다. 1978년 광천공단 외곽에 있던 성당 교리실에서 이 지역 최초로 학교에 가지 못한 노동자들을 위한 ‘들불야학’이 생긴 곳이다. 붉은 벽돌조로 1957년 공소를 설립하며 지어졌던 건물은 민중항쟁 사적27호로 역사성과 의미를 기념하며 벽체의 일부를 보존하고 표지석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듬해 들불야학은 광천시민아파트로 야학의 학당을 옮겼다. 5·18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50-1980)은 박기순이 주도한 야학에 참여하며 1978년 이 곳에 입주했다. 노동운동을 넓히고, 현장 활동으로 지식인과 민중연대를 위해 선구적인 젊은이들이 뜻을 모아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친 곳이다. 이 시기에 5·18 항쟁 중 다수의 교사와 노동자들이 항쟁 활동을 왜곡하는 언론에 맞서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알리고, 항쟁지도부에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시민아파트 들불야학 학당이었다. 바로 광주정신의 근원지인 역사적 공간이다.

최근 이 곳은 광천동 주택재개발구역에 포함되면서 사업의 진척상황에 따라 내년에 이주 철거될 예정이다. 시민아파트는 60년대말 관 주도로 전국적으로 서민용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광주건축100년’에 보면 광주에 지어진 아파트의 시초로 지상3층에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 3개동으로 시청 영선계에서 재직하던 채규당이 설계한 것이다. 원래 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6·25피난민과 영세민들의 판자촌으로 열악한 거주 환경의 주거개선 시범대상지로 원래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184세대로 구성하여 공동화장실과 세탁실을 각층에 두며 연립주택형식으로 계획했었다. 몇 해전 대학 건축학과 4학년 설계 수업에 ‘광주 근·현대 건축의 리모델링’이란 주제로 한 학생의 계획 대상지가 시민아파트였다. 역사를 기억하며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근래에 지어진 대부분의 고층아파트는 벽식구조를 가지며 내부 공간의 가변성에 대한 제약이 많다. 하지만 시민아파트의 골조는 기둥과 보를 중심으로 구성된 라멘조이므로 공간변화가 수월한 구조이다.

현재 이 구역의 재개발 조감도를 찾아보면, 최대의 용적률을 내기 위해 30층이상 솟아있는 고층 탑상형 아파트로 바둑판 배열을 한 대규모 단지를 구상하고있다. 재개발 관계자 측에서는 구역 내를 완전히 밀고 새 판을 짜는게 그들의 사업성에 휠씬 이득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 흔적을 간직한 공간을 사업성이 우선하여 없어진다면, 표지석 하나 정도 남기고 기억에서 사라진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6·10민주항쟁 기념사에서 ‘민주주의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되살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라는 피력했다. 광천시민아파트는 도시재생 차원에서 5·18정신 기념공간을 비롯한 주민들을 위한 문화공간, 도서관 등으로 탈바꿈을 꿈꿔본다. 본디 집은 새로 짓기도 하지만, 고쳐 나가며 기존의 형상에 새로운 공간으로 확장하면서 시간의 켜를 쌓아나갈 때 비로서 더 풍부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광주 최초 연립주택이라는 도시·건축적 측면뿐만 아니라, 역사의 현장을 온전히 기념하는 공간으로만 만들기보다는 공동체적 기억을 간직하며, 동시대 시민과 어우르며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대안을 기대해 본다.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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