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만년필

입력 2018.07.19. 16:21 수정 2018.07.19. 16:26 댓글 0개

만년필하면 법정 스님이 떠오른다. “만년필로 글을 쓰면 속도에 맞춰 글을 쓸 수 있지만 볼펜으로 글을 쓰면 속도가 생각을 앞서 가므로 거짓된 글을 쓰게 된다.” 돌아가신 법정 스님의 만년필 예찬론이다.

스님은 만년필과 인연이 깊다. 스님의 그 유명한 ‘무소유 정신’을 만년필 하나로 간명하게 설명했다. “원고를 쓰기 때문인지 만년필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누가 선물해서 만년필이 두 개가 됐어요. 두 개가 되다 보니 한 개를 가지고 있을 때 보다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져요. 그래서 선물한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만년필 한 개를 다른 이에게 주어 버렸지요.”

만년필의 원래 서양이름은 파운틴 펜(fountain pen)이다. 우리말로는 샘물처럼 솟아오른다 해서 “샘물 펜”으로 번역 됐다. 후에 잉크만 넣으면 오래 쓸 수 있는 펜이라는 뜻의 “만년필”이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동양에 처음 소개 될 때는 영어명을 직역해 ‘천필(泉筆)’, 또는 토해 낸다 해서 ‘토묵필(吐墨筆)이라고도 했다. 1884년 보험 외판원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이 잉크가 흘러나와 계약을 망치는 일이 반복되자 만년필을 발명하게 됐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1897년 일본을 거쳐 워터맨 만년필이 처음 도입된 것이 시초다.

나이드신 분들은 만년필 하나쯤은 선물로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20세기를 통털어 만년필은 선물 목록 열 손각락 안에는 들어갈 듯 하다. 불과 몇 년전만 해도 만년필은 선물로서는 인기 짱이었다.

그러던 만녈필이 학생들 가방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컴퓨터 자판이나 스마트폰 문자 판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간단히 누르거나 터치만 하면 되는 세상에 만년필은 고리타분하기 짝이없는 천덕꾸러기 도구였다. 그러나 만년필은 글을 쓸 때 사람을 섬세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만년필은 기본적으로 집중력과 세심함을 요구한다. 안써 본 사람들은 그 기분을 모른다.

요즘 학생들은 시험이나 볼 때를 빼고는 손수 종이에 글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연유인지 글씨를 예쁘게 쓰는 학생도 많지 않다. 좀 심하게 말하면 대학생도 초등학생 글씨체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도대체 삐뚤 빠뚤이다. 오죽 글을 쓰지 않으면 ‘엄지족’이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엄지족이 넘쳐나다 보니 요즘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누르는 것이라고 오해할 정도다. 만년필의 퇴조는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오늘 부터 각급 학교가 방학에 들어갔다. 부모님들은 방학 선물로 만년필을 하나씩 선물하면 어떨까 한다. 선물 받은 만년필로 소망을 적어 보게 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만년필은 글씨를 예쁘게 쓰게 하니 좋고, 집중력을 높여 인성 교육에도 좋고, 부모님께 고마움도 느낄테니. 이만하면 일석 삼조 만년필 아니겠는가.

나윤수 컬럼니스트 nys8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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