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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었던 강연
입력 2018.07.06. 14:29 수정 2018.07.06. 15:31 댓글 0개강연을 다니다보면 내 스스로도 만족할 때가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반응이 너무 좋아 신이 나기도 하고, 반대로 반응이 없어서 힘들 때도 있다.
수많은 강연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강의는 삼십 대 후반에 600명 가까이 되는 전남 초중고 교장선생님 전체를 대상으로 했던 점심 식사 후의 강연이었다. 담당 연구사의 간단한 소개 후 대강당의 연단에 올랐다. 연로하신 교장선생님들께서 나를 보더니 아예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수면 자세를 취했다. 어린 교수를 보면서 뭘 배울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돋보기안경을 꺼내어 콧잔등에 사알짝 걸치고 자료집을 보는 시늉을 했다. 생각만큼 젊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돋보기 쓴 모습을 보더니 몇 교장선생님들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르게 앉았다. 나는 30대 중반부터 돋보기를 썼다.
2008년에 내가 총장이 되자 내가 어려서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선배가 대학 총장이 되었다고 학교 교문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러더니 후배들을 위해서 좋은 말을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당시 그 학교는 전교생이 유치원생까지 합쳐 70여명이었다. 모든 학생들을 위한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여 학교를 찾았더니 체육관으로 안내했다. 들어가 보니 학년별로 한 줄씩 일곱 줄로 맞추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학급경영 강의를 통해 수업 중에 학생들 집중시키는 방법, 수업을 재미있게 이끄는 방법 등을 교대생들에게 가르쳐오던 터라 별 부담 없이 학생들을 만났다. 그런데 막상 유치원생부터 6학년까지 서로 다른 학년의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먼저 학생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어 마음을 산 후 강의를 시작했다.
체육관이다 보니 마이크 소리는 울리고, 상태마저 별로 좋지 않았다. 유치원생까지 한 자리에 있어서 용어 선택 하나하나까지도 신경을 써야 했다.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든 존재가 초등학생들인데 대학 총장이라는 사람이 앞에서 서서 이야기를 하니 다들 재미없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억지로 끌려온 탓인지 졸린 커다란 눈망울을 껌뻑거리며 빨리 끝났으면 하는 것 같았다. 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그날의 40여 분은 과거 교장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연보다 훨씬 더 힘든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내 생에 가장 힘들었던 강연은 교장선생님 대상이 아니라 초등학생들 대상 강연으로 바뀌었다. 이 경험을 한 후부터는 초등학교 교단에서 평생을 학생들과 함께 하고 있는 내 제자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자기 아이 한 명도 키우기 힘들다며 우울증을 호소하는 엄마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수의 남의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평생을 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얼마나 힘이 들지 짐작이 된다. 이들과 함께 재미있는 배움터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계신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들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연로하신 선생님들 앞에서 강연이라는 것을 하면서 긴장했던 젊은 시절이 오히려 그리워진다. 가장 힘들었던 강연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강연이고 훗날 가장 그리운 강연이 될 것임을 마음에 들지 않는 강연 탓에 밤잠을 설치는 젊은 강사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경험이 쌓이다 보니 초등학생들과도 재미있게, 그리고 이들이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정년이 가까워 오면 내 삶에서 가장 젊은 오늘을 다시 그리워하리라.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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