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그늘을 사랑한 사람

입력 2018.06.25. 16:39 수정 2018.06.25. 17:38 댓글 0개
조덕진의 무등칼럼 무등일보 주필

“선배가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배들의 의무감이라고 할까요”

극단 토박이 임해정 대표와 오월극에 관해 나누던 대화의 일부다.

토박이는 1987년 ‘금희의 오월’을 시작으로 매년 오월극을 올리고 3∼4년 전부터는 자체적으로 5월 상설극을 운영해오고 있다. 열악한 지역공연현실에서 연극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오월극은 운영비는커녕 단원들 식비도 충당이 안돼 돈을 갹출해가며 명맥을 유지해왔다.

“생활인으로 보통일이 아니”라는 반응에 대한 임 대표의 답이었다.

“정말 일을 미친 듯이 하셨어요.. 1980년 이후 삶이 고통이고 죄책감이셨던 것 같아요. ‘금희의 오월’ 공연 때 구 망월묘역 참배를 갔는데 차마 돌아서지를 못하고 묘지 한 구석에서 한 참을 서 있던 뒷 모습이 지금도 선명해요”

광주의 전설적 연극인 고 박효선의 그림자다.

극단 토박이의 역사는 박효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함평 고구마 사건을 극화한 것을 비롯해 사회현안을 무대에 올려 대중과 호흡하는 방식으로 70년대부터 문화선전대로 활동했다. 80년 항쟁이 발발하자 들불야학에서 함께했던 고 윤상원 열사와 투사회보를 만들고, 홍보부장으로 도청 앞 분수대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기획 진행하는 등 항쟁에 적극 가담했다.

그 자신, 이같은 활동을 단 한번도 주변에 발언하지 않았다. 가족처럼 살았던 토박이 단원들도 주변 이야기로 전해들었다고 한다.

어찌 살아남은 그는 이후 광주의 ‘영원한 홍보부장’으로 살았다. 87년 첫 오월극 ‘금희의 오월’을 선보인데 이어 ‘모란꽃’ ‘청실홍실’ 등 오월 3부작을 내놨고 국내와 해외순회공연(미국 1994,1997년)까지 80년 5월 알리기에 앞장섰다. 2010년대 들어서야 논의된 ‘오월의 세계화’를 그는 이미 10년 전 시작한 것이다.

더욱 절절한 건 그의 시선이다. 그는 1980년 전남도청에서 명을 달리한 당시 전남대생 이정연(금희의 오월), 모진 고문으로 정신병을 앓다 죽어간 김영철의 비극(청실홍실) 등 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에게 이름과 생명을 부여했다.

‘그늘이 없는 사람’,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내가 사랑한 사람’)라는 정호승의 시와 오버랩된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는 다른 한편 빼어난 극작가이자 혹독한 연출자였다. 작품과 관련된 무지막지한 역사문화공부를 시작으로 연기자가 표현에 동화되기까지 날밤을 새우기도 일쑤였다.

‘살아남은’ 고통이었을까. 그렇게 미친 듯이 작업만 하던 그는 1997년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하고 만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시대속으로 뛰어들어 이승을 다하는 순간까지 광주의 홍보부장으로 살았던 그. 38주년의 5월을 건너며 그의 후배들은 그를 그린다.

그가 아쉽고 절절하다.

그가 떠난 후, 토박이라는 울타리 주변을 넘어서면 공연술계에서 그의 그림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광주시가 추진하는 그 많은 공연예술 사업 어디에도 전 생애를 바쳐 5월을 일궈온 한 예술인의 그림자조차 만나기 어렵다. 지역 연구자들의 글에서도 사람과 이 땅을 사랑했던 연극인 박효선에 대한 탐구를 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다.

예수를 몰라본 나사렛 사람들인가,

토박이와 문화예술인들이 그의 작품과 일기 등을 묶어 세권의 책으로 엮어낸 것이 전부다. 빼어난 글쟁이 황광우가 집필을 맡아 귀한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는 그를 사랑하는 선후배와 몇몇 예술인들을 뛰어넘어 광주시와 지역의 연구자들 등 공적 영역에서 그를 기억하는 일을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조덕진 문화체육부장 겸 아트플러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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