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광주오면 가볍게 오월민중항쟁에 관한 예술작품 하나쯤 만날 수 있어야”

입력 2018.06.22. 08:43 수정 2018.06.22. 09:36 댓글 0개
“역사는 저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바로 이곳의 이야기”
오월 상설극 이끄는 극단 토박이 임해정 대표

극단 토박이는 광주 공연예술의 대표적 단체 중 하나다.

고정급은커녕 공연한 연극에 대한 보수도 쉽지 않은 광주의 열악한 공연현실에서 수십년동안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있다.

1983년 창단된 이후 끝없이 5월을 소환해 매 5월 뿐 아니라 광주를 찾는 이들을 위해 상시극을 고민하며 3-4년 동안 재능기부로 5월 상설극을 운영하기도 했다. 임해정 대표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오월에 관한 연극이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일상으로, 광주에 오면 5월에 관한 연극 한편 쯤 가볍게 만나 볼 수 있는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극단 토박이 임해정(52) 대표의 소망이다.

30여년 동안 활동해온 연극인으로, 극단을 이끌고 있는 책임자로서의 고민 혹은 소망이 어찌 간단키만 하겠는가 만은 그녀가 지난 30여년의 시간 동안 놓치 못한,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책무이자 꿈이다.대중적으로 성공한 연극, 혹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극인에 대한 욕망이 왜 없겠는가. 그럼에도 풀지 못한 숙제처럼 80년 민중항쟁은 그녀 연극인생의 과제였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열악한 지역 공연 현실에서 연극인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고 더구나 극단을 꾸려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단 한발자욱도 벗어나 본적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연극 인생에 첫발을 내디딘 작품과의 만남 때문이리라고 짐작한다.

입학때 동아리 모집을 보고 전남대 연극반에 들어선 그녀는 암태도 소작쟁의를 다룬 ‘자랏골의 비가’라는 작품에 처음 출연한다.

임 대표는 “당시 극본 뿐아니라 이 극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일제 강점기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비롯한 역사공부를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며 “사회를 둘러싼 문제의 구조적인 부분을 비롯해 연극의 토대가 되는 사회적 배경에 대한 공부가 철저하게 진행되며 연극과 사회를 알아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당시 연극반에서 실력있는 선배들의 창작(집체 창작) 과정을 보면서 창작을 어떻게 하는가 등을 배웠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끝없는 논의와 토론을 통해 방향을 잡고 대본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강단보다 훨씬 더 깊고 심도 높은 공부의연속이었다.

“당시는 대학 극본까지도 검열이 심하던 시절이라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검열을 피하는 것 까지를 고려해야해서 조마조마하고 그만큼 고생도 많았다”는 임 대표는 “당시는 힘들고 무서웠는데 연극을 하면서 그런 치열함과 고민들이 중요한 자양분이 된 것 같다”고 덧붙인다.

당시 전남대 연극반은 사회성 짙은 작품들로 대중에게 호소하는 연극들을 올렸다. 전남대 연극반이 중심이돼 창단된 토박이가 사회적 주제와 80년 5월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모습이다.

극단 토박이는 수년째 공주를 찾는 이들이 80년 5월을 예술로 만나 볼 수 있도록 오월 상설극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주 말 민들레 소극장에서 열린 '오 금남식당' 공연 모습.

‘금희의 오월’과 고 박효선

“지금까지 그렇게 가슴뛰게 하는 작품은 없었어요. 가장 뛰어난 연극이예요”

대학 3학년때 오디션을 거쳐 참여한 ‘금희의 오월’에 대한 변이다.

토박이가 1988년 초연한 ‘금희의 오월’은 광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오월극으로 명성을 날렸다. 시민군으로 참여해 도청을 사수하다 1980년 5월 27일 산화한 전남대생 이정연의 삶을 극화했다. 여동생 금희의 시선으로 가족과 대인시장에서 장사하던 부모님, 시장사람들의 목소리를 빌어 이정연 열사를 기억한다.

도청사수위원회 홍보부장으로 이 열사와 함께 했던 광주의 영원한 광대 고 박효선을 비롯한 토박이 단원들이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그를 지상으로 불러낸 것이다.

토박이 창단 멤버들은 70년대부터 마당극 등 연희무대를 통해 대중선전활동을 해오던 이들로 80년 민중항쟁이 발발하자 항쟁의 주역으로 깊숙이 참여했다.

특히 토박이 창단의 핵심 멤버이자 극단의 주축이었던 광주의 영원한 광대 박효선은 극단의 흐름과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미친다.

“박효선 선배는 극단에서 단 한번도 80년 민중항쟁에 자신이 직접 참여했다거나 어떤 역할을 했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주변인, 선후배들로부터 전해들은게 전부일 정도로 극단에서는 철저하게 일만했고 ‘일중독자가 아닌가’ 할 정도였다” 고 박효선에 대한 임 대표의 회상이다.

“금희의 오월을 공연하고 구 망월묘역 참배를 갔는데 박효선 선배가 올라오지 않고 한 쪽에 한 참을 서 있던 뒷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는 임대표는 “극을 만들때는 날을 새면서라도 감정을 살려내고 반복해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치열하고 엄격한 선배였는데 그분의 그런 열정과 뜨거운 마음이 아마도 오늘 후배들을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1980년을 잊지 않는 법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연극은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더라도 극보다, 영화보다 더한 현실을 살아낸 광주시민들의 눈높이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돈이 되는 것도 돈을 위한 것도 아니어서 오월극은 제작비조차 어려워 재능기부는 물론이고 운영에 필요한 경비까지 갹출해서 충당해야했다, 최근엔 문화재단의 ‘지역특화문화거점지원사업’이 있어 숨통이 틔이기도 한다.

금희의 오월 이후 매 5월이면 금희의 오월을 비롯한 다양한 오월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다 오월에만 선보이는게 아쉬워 3-4년 전부터 자체적으로 상설극을 운영했다. 일주일 연속하거나, 주말에 선보이거나, 기간을 두고 특정 요일에 선보이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실험했다.

더 힘든 것은 갈수록 사그러드는 5월에 대한 문화적 욕구였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오월극을 선보인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제 오월 이야기는 그만해도 되지 않는냐, 아직도 오월이냐’며 마치 6·25 전쟁 취급하던 분위기였습니다.”

지난해 촛불정권이 들어선 이후 ‘세상이 달라진’것을 확 느꼈다. 지난해부터 광주를 찾는 이들이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현장을 둘러본 후 예술로 감상할 수 있는 지 여부를 물어온 것이다.

임 대표는 “너무 고맙고 반가웠다”며 “이런 문화가 좀 더 일찍 만들어졌어야 했고 오월을 기억하는 방식은 그렇게 가는 것이어야한다.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 같아 너무 고맙다”고 말한다.

올해는 매 주말 11월까지 상설 운영하고 외부 요청이 있으면 별도 공연도 하고 있다.

‘변화’는 좀 더 일찍 왔다. 임 대표는 “세월호 이후 세상이 좀 달라진 듯했다”고 말한다.

“국민들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으며 지금 보다 과거의 것들을 돌아보고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왜 이 아픔이 반복되는 건가’를 묻게된 것 같다”며 “세월호 이후 광주민중항쟁에 관심을 갖고 오월 관련 연극에 대해 물어오기 시작했다”고 덧붙인다.

“세월호를 통해 ‘세상을 다시 봐야한다’는 자각, 세월호가 모든 사람의 아픔인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보게하는 기점이 된 것 같다”는 임 대표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광주 오월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어진 것 같다”고 설명한다.

질문을 더했다. ‘아직도 오월이냐, 이제 오월을 나줘야하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답은 간단하고 단호했다.

“지난 역사를 훼손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걸 기억하고 이 사회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아직도’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상투적인 구호가 아니다.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지역의 역사적 상흔을 예술작품으로 남기고자하는 열망이야 중요하지만 당장 극단을 운영하고 이끌어가는 일은 현실이다.

민들레 소극장은 이사하면서 단원들이 1년여에 걸쳐 모든 내부시설 공사를 했다. 그런 지경이나 정규단원에 단 4명에 불과하다. 임 대표를 빼면 송은정 박정운 박정우 단 3명이다. 연극교육이나 청소년 교육, 다양한 문화강사 강의료 등으로 재정을 충당한다. 물론 정규급여는 없다.

임 대표는 “박효선 선배로 상징되는 선배들의 연극과 사회에 대한 열정과 치열함이 우리를 물러나지 못하게 하는 힘이고 앞으로 나아가게하는 원동력 인 것 같다”며 “새로운 문화와 환경을 만들어 나가면서 일상의 부족과 아쉬움을 채원간다”고 말했다.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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