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앵두기일과 시인의 문학관

입력 2018.06.03. 17:28 수정 2018.06.03. 17:31 댓글 0개
이화경 아침시평 소설가

앵두꽃이 피고 졌다가 앵두가 한창 열리는 계절이다. 빨갛고 앙증맞은 앵두가 열리던 화양연화의 시절에 죽어버린 소설가를 기리는 날을 일컬어 오우토기(櫻桃忌), 즉 앵두기일이라고 한다. 생전에 소설가는 ‘여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름에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 여름 꽃과 죽음이라는 단어 사이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지만, 소설가는 희고 환한 여름 꽃에서 저승으로 가고픈 죽음 충동을 어찌하지 못했던 듯하다. 삶과 죽음은 한통속이고, 흰 꽃과 흰 눈은 찰나에 사라지기에 허무한 걸로 치자면 매한가지였음을 소설가는 알았던 모양이다. 지레짐작의 문장을 쓰는 이유는 그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살았던 계절을 다 잊었다는 듯이, 잊어버리겠다는 듯이, 여름의 두 떨기 앵두꽃처럼 연인과 함께 강물로 뛰어든 분인데. 생일과 기일이 같은 날인 분인데.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처음으로 ‘인간실격’이란 소설을 접하면서 그를 알게 됐다. 세상에서 배척당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인간 실존이 살기 위해 선택한 멜랑콜리와 자멸적인 도취가 명징하고 탐미적인 언어로 조율된 소설은 충격적이었다. 나처럼 그의 작품과 생애에 매료된 독자들이 많았던지, 앵두기일이 다가오면 그의 묘가 있는 도쿄(東京)도 미타카(三鷹)시 젠린지(禪林寺)에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심지어 기일 뿐만 아니라 거의 매일 그의 묘엔 추모객들이 바치는 꽃과 술과 향과 담배로 넘쳐난다고 한다.

느닷없이 이국의 소설가 기일을 꺼내 놓는 이유는 지난 주말에 어느 문학관을 갔다 온 소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전에 시 창작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윤리적 책무로 삼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응전을 시적 전략으로 삼았던 시인의 문학관은 호젓하고 소슬한 느낌마저 들었다. 전시된 낡은 시집을 보면서 시인의 격정적인 비관주의와 낭만적인 우울, 청년 특유의 고통스런 내면의 과잉 표출, 부정하고픈 현실에 대한 비장미와 단호한 투쟁 의지가 정직한 언어에 실렸던 시 작품들을 읽으며 밤 샜던 나의 이십 대가 떠올랐다. 문학관을 찬찬히 돌아보고 시인의 친필 원고며 사진과 저서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뒤이어 찾아든 방문객들은 한 분도 없었다.

문학관 전시실에서 단순 관람을 위해 전시된 자료들은 여타의 문학관들과 별반 차이는 없었다. 스펙터클한 비주얼에 시선을 뺏기는 시대적 상황에 문학관의 전시물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왕 문학관을 건립한 마당에 찾는 이들에게 전시물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잠시 고민해봤다. 어쩌면 문학관의 가장 중요한 소장품은 시인의 운명을 감내했던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창작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실과 영감을 받았던 공간 자체가 아닐까. 영화관이나 유물관과 달리 문학관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점은 가시적인 물품들이 아니라 문학 전반에 투영되었던 비가시적인 작가 정신의 위대함과 문학의 향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에 찾아갔던 시인의 문학관은 문학에 문외한인 이들에게 작가의 족적을 이해하게 하거나 문학의 향기를 느끼게 하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구체적인 건립과 운영 방안이 충분히 모색되거나 활성화 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티가 눈에 확연히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지역문학관은 전국적으로 45개 문학관이 운영 중이고, 매년 2-3개의 문학관이 건립되고 있다고 한다. 문학관을 활성화하기 위한 핵심 관건은 문학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문학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부분에서 나와 절대적인 인간성에 말을 거는 절대적인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는 프랑스 작가 조르주 바타이유였다. 필멸의 존재가 목숨을 걸고 절대적인 것들을 써내면서 불멸의 가능성에 기꺼이 다가가 보려 한다는 점이야말로 많은 이들이 문학에 매료되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인 작가의 필멸성과 시간의 무지막지한 퇴화 작용을 끝내 견디어낸 작품의 불멸성의 어긋남이야말로 문학성의 진수가 아닐까. 그렇다면 유한성과 영원성을 매력적으로 배치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데에 답이 있을까.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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