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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만 송이 장미와 아르메니아의 꽃의 바다
입력 2018.05.27. 14:25 수정 2018.05.27. 14:28 댓글 0개여행은 꿈꾸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번잡하고 수선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자체가 시간 속을 걷는 생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은 일탈이며, 뜻밖의 만남은 추억이 되고 감동이 된다. 낯선 길에서 마주하는 자연,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삶과 문화를 접속한다. 하늘과 하늘을 잇는 몽고의 별들, 더 이상 노랑일 수 없는 만추로 덮인 바이칼 호수를 지나는 기차역, 천상으로 가는 계단이 있는 티베트 서부의 영산 카일라이스, 달의 호수가 있는 인도 북부의 스기나가리. 여행을 하며 가슴에 쌓인 풍경들이 어느 날 불쑥 튀어나와 춤을 추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하기도 한다.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이번 여행은 의도치 않은 여행이었다. 오지여행을 함께 했던 지인의 권유로 무작정 여행 갈 짐을 꾸렸다.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는 코카서스 3국 중 조지아, 아르메니아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 전에 여행지에 대한 사전 지식을 미리 챙기지 않는다. 여행을 하면서 생소한 곳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줄어들 것만 같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느끼는 신선함이 반감되기도 하고, 실제로는 내 자신이 학문을 깊게 탐구하지 않는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다.
조지아를 가려면 모스크바행 비행기로 9시간을 타고 가다가 환승한 후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로 가는 항로를 이용한다. 조지아는 원래 그루지아로 불렀다. 그루지아는 과거 소련연방의 15개 공화국 중 한 나라였다. 1991년에 독립한 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정부로 인해 조지아로 국명이 바뀌었다.
아르메니아는 초기 기독교를 수립한 국가로 301년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313년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한 로마제국보다 12년이나 빠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오랫동안 주변국들의 침략과 압제를 견뎌온 국가여서인지 침체된 분위기가 곳곳에 스며있었다.
조지아를 여행하던 중 차안에서 ‘백 만 송이 장미’가 흘러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심수봉이 불러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노래다. 우리 일행은 이 노래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가요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백 만 송이 장미’는 조지아의 국민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눈물겨운 사랑을 노래한 곡이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러시아의 국민가수 알라푸가초바는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가 쓴 시를 노래로 불렀다. 노랫말에 나오는 주인공이 조지아의 국민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이다. 니코 피로스마니는 철도 노동자로 술집의 간판을 그리며 살다가 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 꽃을 사서 그녀의 집 앞을 온통 꽃으로 장식한다. 그러나 무정한 마르가리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떠나버리고, 피로스마니는 가난과 쓸쓸함으로 죽어간다. 후에 이 화가는 피카소에게 영향을 준 프리미티즘(원시성을 추구하는 현대그림)의 화가로 알려진다. 조지아의 국립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되며 조지아의 국민화가로 사랑받게 된다.
피로스마니 사후에 프랑스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자 화가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배우 마르가리타가 늙은 모습으로 전시장을 찾았다고 한다. 이런 애절한 사연을 들은 후에 듣는 ‘백 만 송이 장미’가 조지아의 풍경과 함께 여행자의 가슴으로 아련하게 파고들었다.
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아르메니아의 꽃의 바다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터키에 의해 아르메니아 인구의 절반인 15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으로 근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이다.
우리가 여행 중인 4월 24일은 추모의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4월 23일에 아르메니아 시민들이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시민들이 오전부터 꽃을 들고 추모의 공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이 찾아간 추모공원은 가히 꽃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죽음 위에 피어난 꽃의 바다, 꽃의 눈물, 꽃의 물결들. 우리는 꽃의 바다 속 한가운데에 서서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여행 후에도 ‘백 만 송이 장미’의 애절한 사랑의 노래와 아르메니아 꽃의 바다가 가슴에 피었다가 졌다. 그리고 오월의 광주를 만났다. 국립 5.18 민주묘지로 가는 길에 하얀 이팝나무가 우수수 바람에 떨린다. 3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완전히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월이 되면 광주 시민들 가슴에는 하얀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자유와 민주, 평화를 간절히 원했던 꽃들의 무리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 아픔의 꽃보다는 사랑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원해 본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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