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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행성의 세입자로서의 의무
입력 2018.04.29. 18:00 수정 2018.04.29. 18:06 댓글 0개서울환경영화제에서 일을 시작한지 3년째, 그러니까 올해 5월로 세 번째 에디션을 치르게 된다. 남들보다 딱히 환경 감수성이 높다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환경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연간 수백편의 환경영화를 보면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나름 각성하게 되었고, 이대로 가면 지구는 머지않아 종말을 맞게 된다는 과학자들의 경고가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수백년간 인류는 근대화, 산업화라는 명목 하에 지구를 극심하게 착취해왔다. 길게 잡아도 2백여년에 불과한 인류세(acthropocene) 기간에, 인간은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한 38억년 동안 가해진 파괴의 총량을 뛰어넘는 대대적인 훼손을 저질렀다. 근대 문명이란 결국 지구 깊숙이 구멍을 뚫어 뽑아낸 석유, 석탄,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태워 얻은 에너지로 일궈낸 것이다. 그 결과 발생한 치명적인 후유증들은 ‘기후변화’ 문제로 집약되어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 대대적인 복수를 가하고 있다. 뒤늦게 인간은 이러한 파괴적인 개발이 인간 자신의 종말을 재촉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2015년 발효된 ‘파리 기후협약’은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전세계인들이 모처럼 머리를 맞대 내놓은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 온도 1~2도를 낮추기 위해 전세계가 치열한 노력하는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이 문제가 그렇게 절박하게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다. 지정학적 위치상 섬처럼 고립된 국가인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전세계의 연대 책임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한 지구 온난화 문제보다는 지금 여기의 갈등 현안이 더 시급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세 번의 환경영화제를 치르면서 우리의 환경 감수성이 지나치게 낮다는 아쉬움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올해 들어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어느 때보다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피부로 실감하는 분위기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시도 때도 없이 한반도를 뒤덮는 미세먼지로 인해 나의 건강이 치명적인 위협을 받게되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 봄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고. 하나 더 들자면 얼마 전에 발효된 중국의 쓰레기 수입 금지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쓰레기 대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미세먼지의 주범이 중국이라며 중국 정부를 원망해 왔다. 최근의 많은 연구들이 국내 미세먼지는 중국보다 오히려 국내 요인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결과를 속속 발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문제를 중국 탓으로 돌려왔다. 그런데 정작 중국 정부가 미세먼지, 대기오염의 주범인 쓰레기를 더 이상 수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니까 정작 내 집 앞마당에 쌓인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해 당황해 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쓰레기와 관련한 별다른 규제 장치가 없는 한국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을 잃어버린 유럽 각국의 수출 대체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작년 서울환경영화제 대상 수상작은 자우 리앙 감독의 '플라스틱 차이나'이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수입된 어마어마한 쓰레기 산을 생계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중국인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이 영화는 중국 내에서 거대한 논쟁을 일으켰고 결국 ‘쓰레기 수입 금지’라는 중국 정부의 정책을 이끌어냈다. 올해 중국발 쓰레기 대란이 발생하면서 '플라스틱 차이나'가 여러 매체에 보도되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의 앵콜 상영을 요청했고, 올해 서울환경영화제는 영화의 특별 상영을 결정했다. 이와 함께 해양 미세플라스틱 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플라스틱 바다',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을 다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비포 더 플러드', 10년만에 다시 한번 기후변화에 관한 사자후를 내뿜는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2' 등도 서울환경영화제에서 상영된다. 환경 문제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시민의 자발적인 노력 삼박자가 합을 맞출 때 해결 가능한 복잡한 문제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고유하고 분리된 것으로 경험하지만,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이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멀리서 지구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가 지구라는 터전을 공유하는 운명 공동체라는 것을 똑똑히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늦었지만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다. 지구를 공유하는 행성의 세입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금 나는 기꺼이 서울환경영화제의 ‘삐끼’가 되고 싶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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