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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람’을 찾아 걷다

입력 2007.06.18. 09:42 댓글 0개
고창 ‘무장읍성’과 ‘고인돌 공원’



무더운 날이다. 이제 시작된 여름 볕이 뜨겁다. 밖보다 안의 시원함이 그립다. 떠나기 싫은 날은 장소보다 사람을 떠올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100여 년 전에 죽은 어떤 사람을 만나러 간다. 무장이 생각난 건 순전히 그 사람에 대한 경외 때문이다. 동학의 3대 중심이었던 손화중이다. 그는 무장에서 일어나 마지막 호흡을 풀어놓는 그 순간까지 백성과 함께 했다.

막상 무장에 도착했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은 ‘무장읍성’ 뿐이었다. 무장면 성내리 오래된 몸으로 서 있는 성, 한때 그곳에 동학 농민군이 집결했다. 그러나 무장읍성은 온전한 성곽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온전한 성의 모습은 동학이 작은 농민 봉기에서 전국적인 농민혁명으로 전환된 계기와 관련이 있다. ‘무장기포’로 동학군이 집결하고, 거사의 대의명분을 적어 창의문을 선포했던 곳이 무장이다. 그 상징성으로 무장읍성은 오늘까지 완전한 형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종의 배려였다.

무장읍성과 멀지 않은 곳엔 ‘고인돌 공원’이 있다. 그곳에서도 3000년 전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곳이 한반도다. 무려 3만 기다. 그 중에서도 고창은 2천여 기의 고인돌을 품고 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
‘무장기포’는 동학에서 하나의 전기이며 사건이다. 동학이 전국적인 농민혁명으로 번진 이유가 무장 땅에 있다. 고부농민봉기 때까지는 전봉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무장현의 손화중이 봉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손화중은 전라도 최대의 동학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부농민봉기가 일단락 되고, 참여한 농민들을 관군이 무참하게 살육하는 시절이 얼마간 지속되자 손화중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1894년 무장에서 힘을 합친 두 지도자는 창의문을 발표한다.

‘수령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납게 구는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밖에 향제를 세우고 오직 혼자만 온전 하려는 방책에 힘쓰면서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하니, 어찌 옳은 이치이겠는가’ (3월20일 무장에서 발표된 ‘창의문’ 중)

그랬다. 백성은 뒤에 있고 임금과 관리는 오직 저 혼자 온전할 궁리만 했다. 그들은 수천의 백성이 짜낸 피를 모아 집을 짓고 쌀밥을 먹었다. 손화중은 달랐다. 그가 믿었던 것은 오직 백성이었고, 그가 꿈꾼 나라는 백성이 근본 되는 세상이었다.

손화중의 꿈을 뒤로하고 100년이 흘렀다. 무장읍성의 나무들은 푸르다. 무장읍성은 1417년에 쌓아진 성이다. 길이는 1.2km이다. ‘무장읍지’에는 성의 축성 기록이 전해진다.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승려와 백성 2만여 명을 동원해 지었다. 해안 가까운 지역의 군세 강화가 축성의 목적이었다. 600년의 시간처럼 성은 처음의 모습이 아니다. 객사와 동원, 남문인 진무루만 살아 남았다.

객사 마당에는 공덕비들이 서 있다. 그 안에도 무장의 힘이 담겨 있다. 전해온 말에 따르면 무장현의 아전들은 힘이 세기로 유명했다. 무장에 발령난 현감들 똥줄이 탔다. 까닭은 이렇다. 무장의 아전들은 그 출신이 고려의 토호이거나 출세한 가문의 후예였다. 힘과 힘의 싸움에서 현감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지역에서 중앙의 권력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동학군의 무장기포도 이런 지역적 전통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3000년 전 시간과의 ‘대화’
2000년 12월 유네스코는 화순과 강화 그리고 고창의 고인돌을 함께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무덤도 문화이며 위대한 삶의 유산이다.

특히 고창의 고인돌은 2천여 기로 파악되는 규모뿐만 아니라 형태적 특성도 보여준다. 다른 형태, 그것이 3000년 전 사람들이 지금 우리게 던지는 말이다.

고창의 고인돌은 다르다. 여러 형태가 섞여 있다. 탁자형인 북방식이 있고, 바둑판형인 남방식이 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면 둘이 몸을 합친다. 혼재된 방식이다.

이동과 정착을 병행했을 당시의 사람들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래에선 올라가고 위에서는 내려오고 고창에서 만났다. 사람이 어울려 살다보니 무덤의 형태도 섞였다.

저 무거운 돌들을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옮겨왔을까. 고인돌 공원은 그들이 살았던 집을 보여주고,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도 보여준다. 3000년 전 사람들도 바퀴의 원리를 알았다. 굵은 통나무를 돌 밑에 여러 개 대고 굴리면서 이동했다. 그만한 돌을 움직이려면 상당한 세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집단이 정착했어야 한다.

지금 고창은 시골 소읍이지만 3000년 전에는 거대 규모의 마을이었을 것이다. 2천기의 고인돌은 그렇게 말을 건넨다. 아직 그것이 돌덩이에 불과했을 때 땅 밑으로 많이 묻혔다. “세상 변했제. 지금이나 된께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말하제 옛날엔 누가 알가니, 경지정리할 때도 겁나게 많이 묻혀 부렀어. 요 근처에 논만 뒤집어도 고인돌이 엄청 많이 나올 것이여” 고창주민 안준석(67)씨의 말이다.

고인돌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돌의 무게는 죽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주검을 누르고 있는 저 무거운 바위는 삶의 고달픔을 나타내는 청동기인들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다시는 이 무서운 세상으로 나오지 말라는 비원의 무게로 수천 년 동안 엎드려 있는 바위들,’(이창수 ‘무거운 구름’ 부분)

혹 이런 생각들은 아니었을까 싶다. 돌아보면 거기 오래된 시간이 있다. 3000년의 무게, 지금 떠나면 다시는 세상으로 나오지 말기를….

찾아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IC→방장산 자연휴양림 지나 밤재→고창읍→신흥면→솔재→고창읍.
무장읍성은 15번 지방도를 타고 아산면→무장면 성내리. 고인돌 공원은 무장읍성에서 나와 선운사 방면 길을 따라가면 바로 나온다. 이정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먹을거리 : 무장읍에서 중원회관(063-561-5777, 홍어찜·홍어탕·백반)이 있고, 고창읍에 조양식당(564-2026, 한정식), 용궁회관(564-1331, 풍천장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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