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갑질 공화국에서 을로 살아 남으려면

입력 2018.04.24. 16:17 수정 2018.04.24. 16:25 댓글 0개
박생환 법조칼럼 변호사(법률사무소 미래)

대한 항공 조현민 전무의 갑질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땅콩 회항’으로 유명한 언니 조현아에 이은 조현민 재벌 3세의 갑질에 봄날의 나른한 졸음이 싹 가신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좋은 일만 가득하면 좋으련만 세상일이란 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을 통해 하루에도 몇 건씩 법률상담을 해야 하는 필자는 사무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지만, 상담을 위해 찾아오는 일반 서민 을들의 딱한 사연을 듣다 보면 봄날의 화려함 쯤은 금방 잊게 된다.

좀 심하게 말하면 대한민국은 부지불식간에 갑질 공화국이 된 느낌이다. 실제 현실도 다르지 않다. 법률상담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사람들은 계약관계에서 갑이 아닌 을이 대부분이다. 프랜차이즈 본사와 가맹점계약을 맺은 점주부터 상가건물을 임차한 소상공인처럼 법적 분쟁이 발생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계약서상 대부분 을의 처지다. 왜 그럴까?

우선은 계약사회에서 갑과 을이라는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불이익 탓이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서 내용을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갑의 위치에 선다. 그런 까닭에 갑이 만든 계약서는 당연히 갑에게 유리하게 작성된다. 한마디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을은 그저 계약서 아래에 서명하는 수 밖에 없다. 일부 꼼꼼한 을은 그나마 계약서를 자세히 읽어보고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조항에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계약내용은 갑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얼마 전 찾아온 가맹점주는 가맹본사의 횡포 때문에 가맹계약을 해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니 가맹계약을 해지하더라도 가맹비와 교육비는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는 불공정 계약이었다. 가맹비는 커녕 계약해지시점부터 3년이나 동종업종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이른바 경업금지조항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필자는 계약과정을 검토한 후 가맹본부의 가맹사업법 위반사항 몇 가지를 발견해 공정거래위원회에 위법사항 신고 후 분쟁조정을 통해 겨우 가맹계약을 해지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이처럼 가맹 계약서 문구만으로는 도저히 을은 갑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계약서 이면에 숨겨진 정황, 강행법규 등을 따져 대항하지 않으면 을은 늘 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최소한 살아남으려면 적절한 무기를 찾아 대항해야 하지만 이 조차 쉽지 않다. 왜냐하면 갑과 싸울 적절한 무기를 찾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을에게는 이런 도움 받을 기회조차 별로 없기 때문이다.

주먹구구식 계약도 을의 처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일쑤다. 인테리어 공사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계약서 한 장 없이 구두로 계약을 맺었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흔히 본다. 공사 완료 후에 보니 당초 약속과 달리 저질 재료를 사용한 탓에 결국 하자가 발생해 도저히 영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을은 하자보수를 요구해 보지만 계약내용에 없다는 이유로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공사할 수 밖에 없는 갑의 횡포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금액이 작다”는 이유로 “서로 잘 아는 처지”라는 이유 등으로 아무런 서류 없이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항상 당하는 쪽은 갑이 아닌 을이다. 계약서를 작성해도 문제가 발생하면 불리한 것은 을이다. 반면 갑은 되려 큰소리다.

그러면 을은 항상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같은 갑질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일반 서민일수록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계약서는 백 마디 말보다 중요하다. 가능하면 작성할 때도 애매한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자. 잘 모르겠으면 제3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다.

법은 최소한이다. 계약자유의 원칙상 법은 사인간의 계약에 잘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 임대차보호법, 공정거래법 등 일부 특별법은 을을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률이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히 보호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한 요건을 갖추려면 생각보다 까다롭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수많은 계약을 체결하고 산다. 그 중 대부분은 을이 되어 계약에 임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기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자신만의 무기를 반드시 확보하는 것이 좋다. 못 된 인간들의 갑질이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애초부터 계약서 하나라도 야무지게 챙겨 놓기 바란다. 박생환 변호사 (법률 사무소 미래)

최근 법조칼럼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