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한 장 같은 1500년의 비밀

입력 2007.05.18. 00:00 댓글 0개
나주 반남고분과 복암고분 살구꽃이 떨어지던 날 그곳에 간 적이 있다. 시간은 아득했고, 나와 무덤 속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 그 날 이후 거기 가면 항상 어떤 시가 떠오른다. 그곳은 웅크린 무덤의 역사 반남과 복암고분군이다. 그리고 시는 임영조의 `앞뜰의 살구나무’다.  <살구나무 한 그루 간 곳이 없고, 홀연/ 꽃상여 한 채가 기다리고 있다/ …/가난도 약으로 살다 가신 어머니/ 후광처럼 너무 곱고 화사해/ 저 가마 타고 저승까지 가 보고 싶다/ 사람 벗은 한 그루 살구나무로/ 하르르 작별하는 꽃잎 한 장 무게로.>  사는 일이 저물면 결국 죽음에 닿는다. 결코 슬퍼할 것도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삶과 죽음 사이엔 꽃잎 한 장의 두께로 이루어진 경계가 있다. 그렇게 1500년 전의 무덤은 꽃잎처럼 머리 위로 졌다.  나주에 가면 영산강의 길목을 따라 오래된 무덤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30기가 넘는 무덤들은 크기나 형태도 조금씩 다르다. 누구의 것일까? 어떤 것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 무덤들은 의문만 무성하다. 어떤 무덤은 100년 전만 해도 무덤인지조차 몰랐다. 어쩔 때 보면 역사는 매우 비정하며 그래서 자주 잊는다. 패배자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기억의 저지선 아래로 내려간다.  그곳의 주인들이 세웠던 왕국은 무수한 궁금증만 부풀려 놓은 채 세상에서 사라졌다. 지금 역사는 그들이 무덤 안에 남겨놓은 유물들을 통해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다가간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그 땅에 삼한의 중심이었던 마한(馬韓)이 있었고, 무덤의 주인들도 마한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을 거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삶은 없고, 죽음만 남았다.    항아리 속 1500년의 잠  늦은 봄볕이다. 무덤 옆에서 노인들은 일을 하거나 생을 널어 말린다. 이미 건너간 것과 건너갈 것들의 경계 앞에서 시간의 흐름은 무색하다. 거대한 고분에 몸을 엎드리고 귀를 대보면 어떤 소리들이 튀어나올 것 같다.  나주 반남면 신촌리, 무덤은 또 다른 세계다. 한때 그곳에 왕국이 있었다.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이 나왔다. 환두대도와 금동신도 나왔다. 모두 고대의 왕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다. 영산강의 물길과 인근에서 생산된 철이 왕국의 기반이었다.  신촌리 고분이 만들어졌던 시기 역사는 이미 영산강 유역을 백제의 땅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촌리 고분은 5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복속한 시기는 4세기 후반 정도로 추측된다. 그때 이미 마한이 백제와 통합이 됐다면 어떻게 왕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발견될 수 있을까. 논란은 분분하다.  마한이 세워진 것은 2세기 무렵이다. 그러나 54개 소국들이 연맹체를 이루었던 마한은 기록의 역사에서 버려졌다. 마한이 있었다는 흔적은 있지만 정확한 근거로 작용하는 기록이 없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은 소국 하나에 적게는 1000여 호에서 많게는 1만여 호가 살았다. 그리고 마한 전체에는 10만호 가량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삼한의 어떤 나라보다 컸다. 마한을 병합했던 백제도 사실 마한의 소국들 중 하나였다.  마한의 세력을 증명하는 유물은 옹관이다. 커다란 독 두어 개를 포개 관을 만든 옹관은 대부분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는 장례의 풍습이다. 경기와 충청에서도 옹관이 발견된 예는 있다. 그러나 극히 일부일 뿐이며 따지고 보면 나주의 것과 한몸이다. 영산강 유역보다 먼저 백제에 복속됐을 뿐 그 지역도 한때는 마한의 영토였다. 더구나 길이 3m, 무게 1톤에 이르는 거대 옹관은 오로지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된다.    옹관 속에 묻힌 1500년  2001년 사라졌던 마한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다. 나주 오량동에서 국내 최초로 대형 전용 옹관 가마터가 발견됐다. 그곳에 왕국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물증이었다. 거대한 규모의 옹관을 가마까지 만들어 구워냈다면 작은 세력이 아니다. 점토 채취장이 있었을 것이고, 옹관을 만드는 공방도 여럿 있어야 하고, 운송 물길도 마련돼야 한다. 마한은 결코 작은 왕국이 아니었다.  사실 마한의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유일한 기회마저 사라졌다. 반남고분군의 발굴을 주도한 것은 일제였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부터 이듬해까지 신촌리 9호분과 덕산리 1·4호분, 대안리 8·9호분의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일제는 고대 야마토(大和) 조정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확증을 반남에서 얻고자 했다. 대안리 8·9호분이 일본 천황의 무덤양식인 전방후원분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의 수준이 도리어 일본의 것을 뛰어넘어 관계가 전환되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반남의 발굴 유물이 일본의 것보다 시대적으로 앞섰다. 일제는 2년의 조사를 달랑 한 장의 보고서로 정리하며 서둘러 발굴조사를 마쳤다. 결론은 아주 단순하게 <무덤의 주인은 왜인(倭人)일 것이다>였다. 보고서의 말미 차후 과정을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히 제출하겠다>는 약속 같은 문장을 삽입하기는 했다. 하지만 차후 보고서는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일제가 발굴을 서둘러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주의 고분에서 금관이 나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머지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표적이 됐다. 그렇게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 유물들이 도굴꾼들의 배만 불리고 사라졌다.  “반남의 무덤들은 왕의 관이 무덤 상층부에 있는 구조다. 위만 살짝 파내면 되기 때문에 도굴하기가 쉽다. 환두대도와 금동관이 나왔다는 소문이 이미 퍼졌고 고분은 도굴꾼의 표적이 됐다. 생각하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힘없는 나라였기 때문에 역사를 잃었다.” 나주문화유산해설사 김해진씨의 말이다.    원래는 7기, 지금은 4기만 남은 복암고분  보릿잎이 흔들리고, 무덤은 논 한 가운데 서 있다. 거대한 규모인데 쓸쓸해 보인다. 마한의 비밀을 일부 풀었던 복암고분군이다.  지금껏 역사계의 정설은 369년 마한이 백제에 완전 병합됐다는 것이다. 1996년 이 정설이 흔들린다. 아파트의 모습을 한 무덤이 이때 발굴됐다. 복암리 3호분이다. 죽은 자의 집에서는 놀라운 유물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그런 무덤은 한반도에도 없었고,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고분 하나에서 옹관묘, 목관묘, 수혈식석곽묘, 횡혈식석실묘, 횡구식석곽묘, 석곽 옹관묘가 동시에 발견됐다. 뿐만 아니다. 한 변의 길이가 40m인 사다리꼴 모양의 고분에 무덤 41기가 3층으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3세기부터 7세기까지 그 무덤에 쌓인 시간이 무려 400년이다.  고분의 맨 아래는 옹관묘가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시대를 달리하며 석실묘와 옹관묘, 석곽묘가 자리잡고 맨 위층에 백제식 석실묘가 배치돼 있다. 각 묘마다 유물들도 현저히 달랐다. 특히 맨 꼭대기 백제의 묘제는 7세기 초에 와서야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묘에서만 백제 유물의 특징인 은제관식들이 나왔다. 완전하진 않지만 이런 추론이 가능해진다. 마한은 369년에 사라진 게 아니다. 최소한 6세기 어느 시점까지는 살아 있었다. 어느 묘에서는 왕의 상징물인 금동신발도 나왔다.  복암리 고분이 그때까지 도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기적에 가깝다. 그 무덤들이 무덤인지 몰랐다. 발굴 직전까지 복암리 3호분은 어느 문중의 선산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다른 세 개의 무덤들도 주민들의 의식 속에서는 그냥 산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을 동산의 개념이다.  고분들의 다른 이름은 칠조산(七造山)이다. 한때 복암리에는 7기의 고분이 있었다. “원래는 일곱 기가 맞제. 없어진 지 얼마 안 되야. 쬐깐한 놈 시 개가 더 있었어. 근디 촌사람들이 뭘 알꺼시여. 걍 작은 흙산인지 알았제. 마을 앞에 농지 정리할 때 밀어불고 논 맹글어 불었제. 거기도 다시 발굴하문 틀림없이 옹관이 나올 것인디….” 복암리 주민 장진호(67)씨의 말이다.  반남이나 복암고분을 지날 때면 항상 쓸쓸한 기운을 먼저 읽었다. 그곳이 죽은 자의 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밝혀내지 못한 아득한 시간이 허허롭고, 쓸쓸했다. 언제쯤 저 먼 1500년 전의 시간과 대화할 수 있을까. 무덤은 오늘도 슬프게 시간을 넘는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함인호 ino@gjdream.com   ▲가는 길: △반남고분군-나주 방면으로 13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영산포를 지나고 나면 반남고분군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복암리 고분-1번 국도를 따라 가다 보면 나주 운전면허시험장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에서 구진포 방향으로 가다 보면 다시면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 이건어때요?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