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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봄 기운 완연한 판문점…'손님맞이' 한창

입력 2018.04.19. 12:01 수정 2018.04.19. 14:04 댓글 0개
남북정상회담장 평화의 집 리모델링

【판문점(파주)=뉴시스】 장윤희 기자 = 18일 오전 10시40분. 서울에서 한시간 반을 달려 공동경비구역(JSA)에 도착했다.남북 군사분계선에 위치한만큼 판문점은 두 개의 주소를 갖는다.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그리고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점이다.

남측과 북측 영토에 걸쳐있지만 JSA 지휘통제권은 유엔사령부가 갖고 있다. JSA는 남과 북 경계에 실재하는 엄연한 땅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판문점은 한반도 비극과 대치 상황을 보여주는 지역이면서도 남북 소통 창구를 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판문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철조망과 관제탑 사이에 피어난 목련과 개나리였다. 불과 네달 전 오청성 귀순 사건으로 총격전이 이뤄지던 판문점에 봄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JSA에서 목격한 의외의 봄꽃에, 남북정상회담 일주일 여를 앞두고 기분이 묘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평화의집 주변의 조경 소나무와 잔디는 봄 기운에 더욱 푸릇푸릇했다.

평화의집은 중요한 손님 맞이를 위해 새단장이 한창이었다. 입구는 파란색 가림천으로 가려진 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평화의집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달 초부터 전면 수리에 들어갔다. 평화의 집은 3층 석조건물로 1층에는 귀빈실과 기자실, 2층 회담장, 3층에 연회실이 있다.

평화의집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지만 근접 취재가 허용되지 않아 아쉬웠다. 관계자들은 끊임없이 평화의집을 오가고 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인테리어 자재와 삽들이 있었고, '쿵쿵' 공사하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다.

오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화의집 앞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가진 뒤, 계단을 올라 남북정상회담장인 2층으로 향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생중계된다.

평화의집을 보고 십여미터 떨어진 자유의집을 거쳐 군사분계선으로 향했다. 평화의집은 회담장, 자유의집은 회담을 위한 실무준비 장소로 쓰인다고 한다. 유엔사령부 관계자는 "건물 쓰임새가 다른만큼 관할도 다르다"면서 "평화의집은 국가정보원이, 자유의집은 통일부가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자유의집 후문을 빠져나오니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하는 컨테이너 박스 모양의 회담장이 나타났다. 유엔 상징색을 본따 하늘색으로 칠해진 단층 건물로 남북 대치 상징으로 익숙한 모습이다.

저 멀리서 북측 경비구역인 판문각이 보였다. 마침 이날 북측 통일각에서 실무회담이 열려 통일각 주변으로 경비병이 대거 배치됐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이날 판문각에는 북측 경비병이 한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과 북 경계선에 들어선 유엔사 회담장 건물은 위치 순서에 따라 T1, T2, T3 등으로 불린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 이후 1953년10월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유엔사 관계자는 "T의 의미는 '임시(temporary)'의 약자인 T를 딴 것"이라며 "분단 상황이 이렇게 오래갈 지 몰랐다. 임시 건물이란 뜻의 이름이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고 설명했다.

T1은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T2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T3는 공동 일직장교 사무실로 쓰인다. 취재진은 T2에 들어가봤다. 앞서 북측 인사들이 T2를 살펴보고 갔다는 이야기에 공동경비구역을 실감했다.

회담장은 다양한 크기의 회의 탁자와 의자들로 빽빽했다. 그 중에 길다란 탁자가 눈에 띄었다. 평범한 테이블처럼 보이지만 군사분계선에 의해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정치적으로는 반으로 나누어졌다. 분단의 비극은 테이블도 반으로 가른다.

햇살이 뜨거웠지만 헌병들은 부동자세로 북측을 향해 삼엄한 경비 태세를 보였다.

애초 판문점이 있는 JSA는 이름 그대로 남과 북이 '공동경비'를 서던 곳이었다. 과거에는 우리 현병과 북한 경비병들이 같은 구역에서 경비를 서며 담배를 나눠피고, 양측 기자들이 JSA에서 어울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장교 2명이 숨지는 1976년 도끼 만행 사건으로 '공동경비'는 '분할경비'로 바뀐다.

JSA는 유엔사령부가 참여하는 말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이지만, 남측과 북측에는 분할 경비가 이뤄지는 아이러니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판문점이란 공간이 갖는 중립, 비무장지대 특성이 있었기에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던 시기에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런 대화 시도들이 켜켜이 쌓여져 2018년 남북정상회담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판문점 일대를 둘러보고 오후 2시30분 서울에 다시 도착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판문점에서 봤던 군사분계선, 철조망, 평화의집, 봄꽃들을 떠올리며 현 시점에서 판문점 의미는 무엇일까 곰곰히 되새겨봤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였다고 한다. 널문리란 마을 이름도 널빤지로 이뤄진 문짝과 다리가 있다는 뜻에서 지어졌다. 1951년 10월. 유엔군과 인민군은 정전회담을 논의할 마땅한 장소를 찾던 중 한반도 중간에 위치한 널문리에 주목했고, 한자 표기를 위해 ‘판문점(板門店)’이란 이름을 붙인다.

이후 판문점은 단순한 지역 이름을 넘어서 한반도 분단의 비극, 남북의 대치 상황을 상징하는 정치 대명사로 굳어졌다. 판문점, 그 이름의 고유 의미 그대로 널빤지 다리가 놓여졌던 조용한 시골 마을이 한반도 평화 다리가 되길 간절히 기대하고 싶다.

eg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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