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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에서 길어 올린 고백의 언어
입력 2018.04.07. 23:52 수정 2018.04.08. 13:18 댓글 0개그녀의 지적이면서도 발랄하고 유쾌한 글에 반해서 대중 강연 동영상을 일부러 찾아보기까지 했다. 적당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언어는 우아했다. 그녀는 현학적인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오랜 성찰 끝에 다듬어진 정확성을 띠고 있었다. 책 한 권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젊은 페미니스트가 된 그녀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대학 교수이다. 하지만 동영상 속의 그녀를 보면서 솔직히 무척이나 놀랐다. 그녀는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화면으로는 실제로 얼마나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한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을 위반하는 것만 같은 몸집의 거대함에 대해 묘한 이질감을 느꼈던 내 자신의 고루한 편견이 한동안 남아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고 있던 때에 아마존 서점에 새 책이 나왔다는 걸 알았다. 신간의 제목은 ‘헝거(Hunger)’였다. 영어로 된 작품이었지만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하루빨리 번역되길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녀는 마치 나의 궁금증을 눈치 챈 것처럼 생애에서 가장 무거웠던 때의 몸무게부터 밝히면서 글을 시작했다. 키 190센티미터에 241킬로그램이 나갔던, 그녀의 표현을 따르면, ‘어떻게 그 지경까지 되도록 내버려두었는지’에 대한 고백을 이어나갔다.
88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고백을 읽어나가기란 녹록치 않았다. 책은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결행한 뒤에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날씬한 몸을 만들어낸 성공담도 승리의 서사도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녀는 무시무시하게 살을 찌웠을까? 그녀가 뒤룩뒤룩 살이 찌도록 먹고 또 먹어대고 지방 덩어리와 셀룰라이트 주머니들을 축적하면서 초고도 비만의 몸을 만들어야만 했던 고통의 원인을 읽는 순간, 충격과 슬픔으로 멍해지고 말았다.
착한 딸이자 모범생인 열두 살의 흑인 소녀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백인 소년과 그의 친구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에 그녀는 몸을 바꾸기 위해 먹기 시작했다. 소녀는 뚱뚱해지고 무거워진 몸을 가지게 되면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고,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끔찍한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가능한 멀어질 수 있으리라는 비극적인 진실을 알아버렸기에 음식을 몸에 쟁이고 가두고 삼켜댔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생존자가 된 어린 소녀 안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빈 공간을 메우고 방패막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음식이었다.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가장 사랑했던 명민하고 예민한 소녀는 숲속에서의 가학적이고 굴욕적인 성폭행에 대해 ‘싫어’라고 했던 자신의 거부가 철저히 무시당했던 기억을 언어화 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숲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있는 어휘가 단 하나도 없었던 열두 살의 소녀는 성장을 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더라도 상대를 멈추게 하고 싶으면 멈추게 할 수 있는 안전 용어들’이 있으며, ‘여자가 싫다고 말하면 남자는 그 말을 들어야 하고 하던 짓을 멈춰야 하며’, ‘강간을 당한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열두 살 아이를 위로해줄 방법도 보호해줄 길도 찾을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감 속에서 어른이 된 그녀는 캄캄한 침묵을 벗 삼고 음식으로 유일한 위안을 삼으며 살아냈다.
그녀는 여성을 비현실적인 이상에 구겨 넣으려 하는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이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허기의 감옥 안에서 폭식증과 거식증에 묶여 있었음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과 이성 사이의 불화, 감옥이자 요새가 된 몸의 진실,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 정체성을 이루는 다양하면서도 상충되는 인간 실존의 모습, 상처와 화해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고백의 언어들은 분명 허기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다.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은 상처의 흉터를 걷어내지 못하고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잔인한 세상에서 모진 세월을 겪은 우리 모두 크고 작은 흉터들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자신만 아는 상처와 끝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흉터를 통해 우리는 타인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인생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지 않던가. 심장을 펼쳐 보인 고백록을 써준 그녀 덕분에 오랜만에 내 허기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록산 게이임을 밝힌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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