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밟으며 시간의 강 건너고

입력 2006.11.24. 00:00 댓글 0개
담양 관방제림과 메타세쿼이아길 쓸쓸한 가을이다. 겨울을 바로 앞에 둔 가을은 언제나 그렇다.  이 무렵 어떤 시인은 자기 안에 대고 이런 질문을 했다. <기러기 지나가려 하니/ 쓸쓸하지 가을 하늘아?// 난 예 논두렁에서/ 너처럼 저물 순 없겠다.> 시의 말미에 가서는 답도 낸다. <난 어딜 좀 다녀와야겠다> (김영남 `상강 무렵’ 중)고.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다녀오고 싶은 길이 담양에 있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메타세쿼이아길과 관방제림이다. 그곳에 가면 항상 `사이’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사이, 거기 나무들 사이로 길이 있다. 사이란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는 적당한 거리쯤 된다.  두 곳은 가장 아름다운 길이면서 또한 가장 아름다운 숲이다. 도로의 이쪽과 저쪽, 혹은 강둑의 이쪽과 저쪽에 나무들이 서 있다. 곳곳에 틈이 있고 길만 벗어나면 나무들은 사라진다. 울창한 숲은 아니다. 하지만 나무들 사이로 걸으면 `숲으로 된 성벽’ 같은 이미지를 만난다. 이쪽과 저쪽 그 사이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 관방제림은 두 가지 걷는 맛이 있다. 하나는 담양천 바로 옆 물가를 걷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거수들의 낙엽을 싸락싸락 밟는 것이다. ⓒ광주드림 함인호  관방제림(官防堤林)에 간다. 담양천이 흐르고, 천 가장자리로 나무들이 길을 이룬다. 오래된 나무들이다. 그 나무들이 그곳에 뿌리를 박기 시작한 세월은 길다. 무려 300여 년의 시간이다. 나라에서 조성한 숲이다. 그냥 심은 게 아니다. 제방림과 방풍림이다. 단순히 풍경의 나무가 아닌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또 주민들의 아늑한 쉼터다. 항상 부러웠다. 아무렇게나 앉아서 쉬고 있는 담양 사람들을 볼 때면 내 사는 곳 주변에도 이런 곳이 있다면,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여름이라면 거기 나무 그늘에 앉아서 잠을 자거나 사는 이야기를 한다. 지금 같은 가을이라면 떨어진 노거수들의 낙엽을 싸락싸락 밟으며 걷는다. 담양 사람들은 그렇게 관방제림에서 시간의 강을 건넌다.
▲ ⓒ광주드림 함인호  “시간나문 와, 여기 앙거 있으문 맘도 편하고, 아는 사람들 얼굴 보는 재미가 있어. 화투도 치고 장기둘 때도 있고, 바둑도 재미지고 그래. 우리는 경로당이 따로 필요 없어. 산책할라문 여기보다 좋은 데가 조선팔도에 또 없어.” 담양주민 이판석(69)씨의 말이다.  관방제림은 조선 중기 인조 때 처음 조성되기 시작했다. 담양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둑에 조성한 제방림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나무들은 자랐고, 또 새로운 나무들이 더해졌고 하천을 사이에 두고 울창한 숲을 형성했다.  나무들에 얹혀있는 세월은 대략 200년에서 300년이다. 나무들의 크기며 두께가 우람하다. 몇 아름이다. 팽나무, 느티나무, 음나무, 푸조나무, 벚나무 등 나무의 종류도 다양하고, 저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제방림으로 그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 숲이 이 나라에 흔치 않다. 둑길을 따라 숲은 2km를 이어진다. 나무들은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또한 검증받은 숲이다. 2004년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 ⓒ광주드림 함인호  한비야가 그랬다. 그 길을 두고 `갓길이 전혀 없어 걷는 이에겐 마땅치 않은 길’이라고, 사실이 그러했다. 24번 국도는 통행량이 만만치 않을 길이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도 무수히 오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편안한 길이 되었다. 바로 옆에 큰 도로가 나면서 차량 통행은 거의 없다. 편안하게 걸어도 탓할 사람 없다.  메타세쿼이아는 화석 같은 나무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 신생대 초기의 나무다. 그리고 한때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나무였다. 1940년대 중국에서 다시 발견됐다. 그렇게 다시 나타난 나무는 중국에서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담양에 메타세쿼이아가 심어진 것은 1972년이다. 가로수로는 전국 최초로 1500그루가 심어졌다. 벌써 나무들의 키가 20m는 족히 된다. 아주 잘 자라는 나무다.  국도 24호선, 메타세쿼이아길은 8.5km가 이어진다. 아름답거나 찬란하다. 특히 이 계절에 그렇다. 여름 푸른빛은 모두 졌다. 바늘 같은 나뭇잎이 모두 갈색이다. 물이 깊게 들었다. 누구나 그 갈색 터널을 통과하며 걸으면 가는 가을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냥 한없이 걷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길의 일부가 사라질 뻔한 사건도 있었다. 광주와 순창을 잇는 국도 확장공사로 인해 600여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 위기에 놓였다. 실제로 베어낼 나무에 페인트칠까지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켰다. 주민들이 지역 단체들과 연대해 도로 선형 변경을 요구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나무들도 제 빛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그 길의 아름다움이 증명된 사건도 많다. 2002년 산림청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거리 숲’으로 선정됐다. 건설교통부에서 선정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람 마음은 모두 다르지 않다. 보는 눈도 비슷하다. 이 나라의 영상물들이 그 풍경을 빌려다 쓰는 것은 당연하다.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에 메타세쿼이아길이 등장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가을로>에서도 그 길을 만날 수 있다. 그 길에 서서 주인공 김지수는 이런 질문을 한다. “길 위에 길이 만들어지는 거겠죠?” 정말로 그렇다. 그 길에 들면 알게 된다. 길과 길 사이에서 길은 만들어지고 있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함인호 ino@gjdream.com ▲가는 길: 광주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담양 순창으로 빠지는 24번 국도를 타면 곧바로 메타세쿼이아길과 연결된다. 관방제림도 메타세쿼이아길 바로 옆에 있다.
▲ ⓒ광주드림 함인호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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