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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에 대한 오해 벗어나기
입력 2018.03.25. 16:00 수정 2018.03.26. 09:50 댓글 0개‘암기식 교육’이라는 말은 주입식 교육이라는 말과 함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본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애를 쓰며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상식처럼 퍼지고 있다. 아예 암기는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나고 있다.
암기란 배운(學) 후에 익혀(習)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익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에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어떤 지식이나 기능이 저절로 떠오르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뇌가 하는 ‘생각이라는 활동’은 필요한 정보를 뇌 안에서 자체 검색하여 이를 바탕으로 주어진 사태를 분석·비판하고, 나아가 시공을 넘나드는 창조적 생각을 펼쳐나가는 활동이다. 만일 저장돼 있는 정보가 별로 많지 않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검색이 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생각의 과정이 자주 끊기게 될 것이다. 많은 단어와 문장이 뇌에 암기되어 있는 우리말로 생각을 전개할 때에는 생각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만 외국어로 생각을 전개하려고 하면 어휘력의 한계 때문에 생각이 자주 끊기는 것과 같다.
암기한다는 영어 표현 중에 ‘learn by heart’가 있다. 암기하는 것을 왜 가슴으로 배운다고 표현했을까? 가슴으로 배운다는 것은 머리로 분석하고 이해해 따지며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필요한 순간에 저절로 떠오르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암기는 머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통해서도 한다. 운동선수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활동을 의식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 상태 즉, ‘적응무의식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반복해서 학습하는 것은 몸이 암기를 하도록 하는 활동이다.
타인의 지식, 작품, 행동을 적응무의식상태에서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암기의 주요 목적이다. 모방은 무언가를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다. 방황하던 어린 피카소가 매일 미술관에 들러 종일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실력을 키워 나갔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일화이다. 우리 뇌와 몸은 반복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기능을 개선하고 변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암기는 분석·비판·창의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은 암기의 의미와 효력을 오해하거나, 우리 뇌의 변형 능력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암기식 교육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동안 시행되어온 암기식 교육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 뇌는 특성상 이해를 해야 쉽게 암기할 수 있다. 그런데 원리를 이해시키지 못한 채 무작정 외우라고 하면 많은 학생들은 외우기 힘들어 한다.
이렇게 무작정 외우라고 하는 것을 주입식 교육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식이나 사실은 겨우 외웠다고 하더라도 그 기억이 오래가지 못하고 필요할 때 꺼내 쓰기도 어렵다. 지식과 기능의 특성과 필요성을 이해시키지 못한 채 억지로 무작정 외우도록 하는 교육법을 ‘단순암기식 교육법’이라고 부른다면 이 단순암기식 교육법이 나쁜 것이지 암기 활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암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가 퍼지면서 학교에서는 외우는 활동을 시키지 않고, 학생들도 점차 외우는 것을 힘들어 하고 있다. 요새 초중등학교 현장에서 실시되는 수행평가는 주로 배움(學)을 돕고 측정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익히는 것(習)은 학생 몫이라 생각한다면 학생들에게 익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익힌 정도를 측정하는 평가를 통해 익힘 활동도 도와야 할 것이다.
배움만 강조하는 사이에 익힘 활동에 필요한 끈기와 인내를 잃어가는 학생이 늘고 있다. 이는 결국 학습하지 않거나 궁극적으로 학습역량을 갖추지 못한 학생의 증가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단순암기식 교육의 폐단을 들어 암기마저 문제시 하는 것은 유아 욕조의 물이 더럽다며 버리라고 했더니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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