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사랑과 결혼은 절대적 명령이 아니다

입력 2018.03.23. 09:53 댓글 0개
인문지행의 세상읽기
개인인가 사회인가 -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선택은 틀린 것인가?

루벤스 작 '파리스의 심판'

지나친 내면화와 사회화로

평생 책임감, 죄책감을 가지며

고통 속에 짓눌려 살아가느니,

한 번의 삶에서 잠시의 행복이라도,

유한한 행복이라도 느껴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수학을 배우는 고통

시내버스 안이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대화를 나눈다. "난 영어는 좋은데 수학이 개 싫어!", "나도! 수학 정말 짱 나." 사용하는 단어는 달라졌지만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모습 아니 부모님 그리고 그 이전에 공부하던 누군가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 수학을 좋아하고, 수학이 그 개인의 전공과 직업으로 연결되어 그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학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 수학과 연관된 전공을 하지 않는,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평생 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할 사람들까지 왜 수학을 배우는 고통을 감내해야할까?

갑자기 왜 수학이냐고? 그렇다면 다른 상황을 이야기해보자. 한 청년이 있다. 그 청년의 집은 가난하다. 아직 독립하지 않은 나이이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그 청년의 부모가 가난하다. 그 청년은 다른 친구들처럼 놀고 싶어도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기 위해 놀지 못하고 일찍 귀가한다. 공부에,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것에, 알바에 쉴 틈이 없다. 그 청년은 잠시 이런 생각을 한다. 나도 좀 놀고 싶다고,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고 싶지 않다고!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욕구에 놀라서 죄책감을 느낀다. 성실한 이 청년이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파리스와 헬레네의 운명적 사랑

이제 마지막 사례이다. 아주 오랜 옛날 트로이라는 곳이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곳에 잘 생긴 파리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형 헥토르를 따라 스파르타로 떠난다. 그곳에서 평생의 인연이라 할 만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헬레네! 후세에 미녀의 대명사로 불리는 여자이다. 하필이면 그녀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이다. 파리스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파리스는 그녀와의 사랑의 결과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했다. 부모님의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기대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고국 트로이의 안전, 국민들 각각, 그리고 그 국민들의 후세대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욕구는 국가 전체보다 자신 그리고 한 여인에게 기울었다.

트로이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아킬레우스를 중심으로 해석할 수도, 헥토르를 중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파리스의 선택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다수의 사람들은 파리스의 선택을 무모하다고 여긴다. 충동적이고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책임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여인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부모자녀의 정마저도 버리곤 하는데, 오히려 사랑 때문에 국가를 망쳤으니 말이다. 이런 상식적 생각에서 잠시 떨어져, 사랑과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도 의무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닌 진정한 사랑과 행복한 결혼에 대해서!

파리스와 헬레네

결혼은 갈등과 고통을 수반… 내면의 소리는 압력으로 전파

#결혼은 사회화와 문명화의 댓가

많은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는 것일까?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빈번한 갈등을, 고통을 가져다는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결혼의 고통을 충분히 본 사람마저도 자녀나 후손에게 결혼을 권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일정한 관습이 일종의 계약이며, 형식이며, 그것에서 벗어나거나 깰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출산만 하지 혼인을 하지 않는 부부가 증가하는 것, 미래학자가 미래에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을 보면 결혼이란 절대적 명령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인 냥 생각한다.

교육, 사랑, 직업 등 우리는 자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의 압력을 받고 있다. 그 압력은 명절날 듣게 되는 친척의 인사말 정도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공기처럼 마셔왔던 접촉이 우리의 내면의 소리가 된, 바로 그 압력이다. 누가 뭐라 손가락질 하지 않아도, 타인보다도 더 가혹하게 자신을 매질하던 내면의 소리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사회화와 문명화의 댓가이다.

사회의 요구를 내재화하여 잘 적응하는 것도 가능하다. 수학을 잘하여 성공하고, 수학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이상적이며,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이다. 효자도 행복할 수 있다. 한 여인을 사랑하여 결혼하는 자도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역할과 개인의 욕구가 일치하여 내적인 어떤 갈등이나 번민도 없는 경우는 매우 기적적이라 할 것이다. 다수의 인류에게는 그런 기적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회나 국가와 등져야 할까? 만일 그 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사회적 방법이 없고, 고통이 너무 크고, 사회나 국가라는 큰 공동체를 담기에는 마음이 좁은 일반인에게 남은 선택이란 그 개인의 욕구와 가치가 지향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아닐까? 지나친 내면화와 사회화로 평생 책임감, 죄책감을 가지며 고통 속에 짓눌려 살아가느니, 한 번의 삶에서 잠시의 행복이라도, 유한한 행복이라도 느껴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욕구와 문명의 상관관계

프로이트의 학설은 그 당시에도 그리고 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들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기에 여전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프로이트는 개인의 욕구와 문명은 상존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즉, 문명은 욕구의 억압으로 얻은 대가인 것이다. 만일 욕구가 통제되지 못한다면 문명은 한 하루에 멸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개인과 국가, 개인과 사회가 병존하기 위해 개인이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변형하여 만족시키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말은 참 쉽지만, 현실에서 욕구의 승화란 너무 자주 실패한다. 은폐된 공간에서 더 은밀히 즐기거나, 퇴행적인 방법으로 그 욕구를 분출한다. 사회는 그러한 것을 못 본 척 눈감아 준다.

파리스를 무책임하고, 파렴치하고 어리숙한 사람의 전형으로만 보지 말자. 긴 인류의 문명화과정에서 모든 인간이 적응을 위해 나아갈 때, 그 옆으로 잠시 빠져나와서 다른 방식을 삶이 가능함을 몸소 실천한 용기 있는 젊은이로 봐주자.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로, 남편과 아내로, 학생과 교사로, 직장인과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을 벗어나고 싶지도, 벗어날 용기도 없는 우리들을 위해 대신 환상의 위로를 전달할 꿈속의 인물이라 여겨보자.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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