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조건절로 시작하는 반성문

입력 2018.02.25. 13:31 수정 2018.02.25. 13:36 댓글 0개
이화경 아침시평 소설가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Me Too, 나도 말한다) 운동이 사회 전반에 걸쳐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벌써부터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고, 심지어 ‘너 혼자 입 다물고 있으면 모두가 편하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정신 나간 사람도 있다.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당했던 고발의 내용은 너무도 생생하고 끔찍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런 사태는 여성인 내겐 너무나 익숙해서 절망적이고, 아마도 싸움은 지리멸렬하게 끝날 것 같은 씁쓸한 예감 때문에 미리 암울한 기분마저 든다.

여성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자주 거론되곤 했던 남성 시인의 성추행에 대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서 발언했던 날 이후로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그게 사실이냐고. 문학 판에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고 벌어지느냐고.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당신들의 판에서는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힘과 권력의 오용과 남용에 대한 사례들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들 수 있다고. 너무도 전방위적이고 총체적이고 보편적이고 일상적이어서 다 말하기가 고통스럽다고.

아시다시피, 폭력에는 예술도 스포츠도 법도 정치도 종교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여전히 성폭력과 관련된 보도가 터지면 먼저 사실관계부터 따지고 보는 이상한 엄정함과 야릇한 꼼꼼함이 여성은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믿음직한’ 증인이 되지 못한다는 혐의처럼 느껴져서 불쾌하다. 폭력을 당한 고통스런 사건을 공개적으로 토로하기까지 치욕과 분노와 자기비하가 뒤엉킨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는지 다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 관계를 까발리기에 바쁘다. 고발한 여성들의 품행과 인성과 용모를 시시콜콜하게 트집 잡으면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용기와 발언할 권리와 상처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꺾으려는 2차 가해의 양태는 마치 미투 운동에 대한 후속 매뉴얼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척박한 이 땅에서 이 정도의 성취를 일구어낸 여러 분야의 거물들을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 괴물이 마치 고발한 여성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힘없는 여성이 유력한 남성의 경력을 뒤엎은 게 아니라 그 경력을 진즉에 끝장냈어야 마땅한 행동을 이제야 노출시켰다고 말해야 정확한 것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의 반성문을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조건절로 시작한다. ‘피해자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이라는 모호하고 책임 회피적인 문장은 과거의 잘못을 이번 기회를 통해 통렬히 깨달을 줄 아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나르시시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어떤 폭력이 피해자의 느낌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자기반성의 기준으로 삼는가.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교통사고를 당한 피해자가 안 아프다고 ‘느꼈다면’ 가해자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건가.

얼마 전에 남성 시인을 ‘괴물’로 지칭한 여성 시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잠시 숨을 골랐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내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의도와 감정을 헤아리기 위해 생각의 속도를 조절하는 오랜 습관이 남아 있음을 순간 깨닫고 씁쓸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나는 그에게 미투 운동은 젠더 감수성이 바야흐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고발이 추문과 가십으로 소비되는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답했다.

판도라의 상자는 활짝 열려졌으며 거기엔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절친한 친구가 말한 것처럼 미투 운동에서 실수는 발생할 수도 있다. 당연한 거다. 실수를 두려워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주저주저하면 한 걸음도 뗄 수 없게 될 테니까. 다만 글을 쓰는 작가 입장에서 무엇보다 평생에 걸쳐 쌓아왔던 여성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성추행 고발로 인해 단박에 사라지고 오로지 성추행 대상자이자 피해자라는 타이틀로만 회자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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