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그만

입력 2018.02.12. 14:21 수정 2018.02.12. 14:31 댓글 0개
조덕진의 어떤스케치 아트플러스 편집장 겸 문화체육부장

새해를 하루 앞 둔 밤, 굶주린 한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거리를 걷고 있다.

바쁜 세밑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바쁘고 소녀에게 성냥을 사줄 여유가 없다. 창 너머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배경으로 다정한 한 집안의 풍경을 바라본다. 성냥을 팔지 못하면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소녀는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성냥 한 개비를 긋는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온갖 환상이 나타난다. 추위를 녹이고도 남을 큰 난로,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불빛은 높은 하늘로 올라가 밝은 별이 된다. 그 불빛 속에 할머니가 나타난다. 소녀는 자신도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추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소녀는 미소를 띤 채 죽어 있었다.

설 명절이 코앞이다.

민족 대 명절, 민족 대 이동이라는 언론의 호사가 아니더라도 분위기는 길거리에서부터 가득하다. 도심 거리는 벌써부터 차들로 붐비고 움직임이 여의치 않다.

도시의 수런거림에는 흥겨움이 가득하고 도로는 얽히고 느려져 명절이 다가왔음을 몸으로 증언한다. 선물을 나르는 택배차량, 오토바이도 고단한 일상이 마냥 힘들지 많은 않다. 이른 인사를 나누는 바쁜 발걸음들 의례로 불편하거나 즐거움이거나 여하한에 명절이다. 얽히고 설킨 일상도 그 흥을 어찌하지 못한다. 이 한 때 만이라도 달려가 안길 그곳, 그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렘은 충만하다.

그렇게 그리움으로 가는 길은 불편해도 좋고 고단해도 즐겁고 행복하다.

세태에 따라 풍속도는 변하지만 달려가는 마음만은 시대와 공간을 너머 항상이다.

잠깐, 이 흥겨움과 설렘이 낯선 이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몇 년 전 잠시 마음과 시간을 나눴던 쉼터 아이들의 눈망울이 잊히지 않아서다. 인근의 미혼모 쉼터의 어린 여성들, 부모 품을 떠나 보호소에서 일상을 나는 어린 생명들..

일상의 고단함마저 그리운, 아니 단 한번만이라도 일상의 전장에 내던저지기를 소망하는 이들이다.

쉼터 청소년들은 대부분이 가정의 따듯함을 누리지 못한다.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부모와 연결이 차단된 경우다. 더러는 부모의 존재가 외려 아이들에게 폭력이되고 일상을 건너는 발걸음을 잡아채기도 한다. 부러 가족과 연을 끊거나 행여 부모가 알까 두려워 하는 경우도 있다.

쉼터의 슬픔은 그같은 사연들이 매번 반복되고 있는데 있다. 아직은 우리사회가 이들이 상처를 딛고 사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부족해 아이들은 잠시 몸을 의탁하고 또 그렇게 떠난다.

이들 청소년들에게 명절은 가혹하다.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가족의 온기를 나누는 그 단란하고 오붓함이 이들에게는 외려 상처로 박탈감으로 소외감으로 더욱 크게 다가드는 것이다. 잠시 만났다 헤어져야하는 쉼터 선생님들에게도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렇게 잠시 머물렀다 갈 뿐이다.

19세기 네덜란드 거리에서 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는 발걸음은 때로 추운거리에서 언 손을 불며 성냥개비로 온기를 달래는 소녀의 아린 눈망울을 스치고 만다. 나의 무심함 혹은 내 일상에의 충실은 그렇게 문득 맘 둘 곳 없는 이들에게 깊은 외로움을 주고 만다.

강요된 불행을 해처나가는데 어쩌면 따듯한 눈길, 손길 한번이면 족할지도 모른다. 어린 소녀가 돌아가신 할머니 품을 찾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여느때보다 풍성하고 흥겨운 평창동계올림픽에 설 연휴까지 설렘과 흥으로 가득한 이 시간들, 그늘 선 이들도 함께 할 수 있는 명절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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