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불(火·fire)

입력 2018.01.29. 16:08 수정 2018.01.29. 16:13 댓글 0개

아그니(Agni),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불카누스(Vulcanus), 로키(Loki), 카구츠치(カグツチ), 펠레(Pele), 아타르(Atar), 베스타(Vesta), 샐러맨더(Salamander). 알 듯 모를 듯한 이들의 공통점은 불(火)과 연관 깊은 신(神)의 이름이다. 아그니는 인도 신화, 헤파이스토스는 그리스 신화, 불카누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이다. 로키는 북유럽 신화, 카구츠치는 일본 신화에 나온다. 펠레는 폴리네시아, 아타르는 조로아스터교에 등장한다. 그리고 샐러맨더는 서양에서 사대원소의 정령 중 불의 정령으로 여겨진다.

신의 영역이었던 불이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온 것은 BC 50만년 전 베이징 원인(Peking man) 때다. 최초로 불을 사용한 인류다. 다만, 1981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발견된 유적은 불을 자유롭게 사용하던 시절을 BC 142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뒤 인류가 채화(採火)하는 방법을 확실히 터득한 시기는 신석기시대인 BC 7천년에 이르러서다. 구멍을 뚫거나 마찰을 이용하는 기구를 사용하거나 혹은 황철석(Pyrit) 등에 부싯돌을 부딪쳐서 불을 만들었다. 처음 불을 사용한 뒤 제조에 이르기까지 수십만년이 걸렸다.

불이 인류 문명의 발달에 기여하는 바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인간이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할 처음 무렵에는 음식을 익히거나 체온을 유지하는데 용이하게 씌였다. 또 사냥이나 전쟁에서도 불몰이로 사용했으며 벌레를 죽이거나 열매를 건조시킬 때도 불을 이용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덤불이나 잡목을 태워 더 좋은 초원을 얻는데도 매우 유용했다. 지금도 열대지방에서 행해지고 있는 화전농법(火田農法)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세월을 건너 뛰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대부분도 결국은 불을 생성하고 제어하는 기술과 관련 깊다.

종교에서도 불은 매우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종교의식에 사용하는 성화(聖火)가 단적인 예다. 고대 베다 경전에는 아그니를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여겼다. 부라만 가정에서는 지금도 아그니를 숭배하기 위해 성화를 지킨다고 한다. 고대 로마에서 성화를 4명의 베스타 처녀에게 지키게 한 것도 신성함 때문이다. 그리스의 위대한 과학자와 철학자들도 불을 매우 신비한 존재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흙·공기와 더불어 불을 모든 생명체와 물체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 여겼다. 플라톤도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이 네가지 원소를 사용했다고 믿었다.

수십만년 인간을 이롭게 한 불이 요즘 우리를 아프게 한다. 충북 제천 화재(火災)에 이어 경남 밀양에서도 화재가 발생해 수십명의 귀한 생명을 앗아갔다. 안타깝기 짝이 없다. 불의 신이라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할 듯 싶다.

이종주 논설실장 mdl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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