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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어른
입력 2018.01.28. 12:09 수정 2018.01.29. 08:22 댓글 0개의재 허백련은 60~70년대 광주의 정신적 어른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남종문인화 대가로 불린 그는 회갑이 되던 60세가 되자 의도인(毅道人)이란 호를 사용한다. 의재(毅齋)란 호는 40대 중반까지, 그리고 이후 의재산인(毅齋散人) 시대를 거쳐 60에 이르러 ‘의도인’의 세계로 넘어온다.
왜 회갑 되던 해 의재는 ‘도인’이란 호를 사용하고자 했을까?
그를 이해하려면 60이란 숫자와 의재의 생각, 사상을 살펴 보아야한다. 그래야 의재가 왜 ‘도인’이란 호를 60들어 사용하고자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두 가지 의미로 호를 사용한다. 하나는 자신이 목표로 삼아 도달한 경지를 표현하거나 또 하나는 지향하고자 하는 목표나 그에 대한 의지를 호로써 나타내기도 한다. ‘의도인’은 후자적 성격이 강하다.
먼저 60이란 숫자로서 논어 위정편을 보면 공자는 60세를 이순(耳順)이라 했다. 자신을 되돌아보며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됐다”고 부연했다. 요컨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60이라고 했다.
의재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춘설헌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책까지 펴낸 소설가 문순태 선배는 의재의 일생을 돌아보고 “의재는 철저한 유학자”라고 말한 적 있다. 유학의 핵심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천 중시의 사상이다.
이런 의재가 이순의 나이가 되어 자신의 호에 ‘도인’을 사용한 것은 일종의 프레임이다. 그렇게 살고자 한 것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프레임을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유학자였던 의재가 목표로 삼은 도인의 삶은 과연 어떤 삶이었을까?
신영복 선생이 도에 대해 풀이한 내용이 있다. 도인의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로서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도)’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는 풀이다.
신영복 선생 말대로 도(道)는 길이고,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다. 머리카락 휘날리며 삶의 한 가운데를 걸으며 생각하는 도인은 자신과 소통하고 또 세상과도 소통한다.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는 다름 아닌 편향성이 배제된 균형성의 공간이자 공(公)적인 영역이다. 이런 공적 공간을 걸어갈 때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객관성 유지다. 이 객관성 그 끝에 객관적 진실인 참(眞)이 있고, 참대로 사는 것이 도(道)의 세계다.
수기치인을 중시한 의재는 홍익인간을 그의 실천적 도의 삶 목표로 삼았다.
하늘을 사랑하고, 딛고 있는 이 땅을 사랑하며, 또 사람을 사랑하는 삼애사상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은 바로 의재가 추구한 참 가치, ‘도’의 핵심사상이다. 의재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60에 이르러 한층 홍익세상 추구에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연진회(1938년)를 만들어 제자들을 육성하고, 해방이 되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농촌지도자 양성이 시급하다며 농업기술학교 삼애학원을 설립(1947년)한 의재였다.
춘설차 다원을 조성하고 차문화 보급에 나선데도 까닭이 있다. “우리 민족이 차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맑은 정신으로 판단해 실천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홍익적 생각에서다. 우리에게 부족한 합리성을 얘기한 것이다.
광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길을 물으면 홍익사상에 근거한 답을 내놓았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고 말하고자 했다.
이러한 큰 뜻을 품고 실천한 의재를 보고 광주는 그를 정신적 어른으로 대접했다.
“무등산 물이 마르면 나도 말라 죽는다”는 의재 선생이 떠난지 오는 2월 15일로 어언 41년이 된다.
오늘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찾아가 길을 물을 수 있는, 의재와 같은 광주의 정신적 어른은 누구일까?
광주의 문제에 대해 서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고 묻고 소통하며 길을 찾는 노력을 우리는 또 다하고 있는 것일까?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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